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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n 16. 2024

모두가 잠재적 내연남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지기 시작할 때쯤. 우리 가족은 10평이 조금 넘는 아파트에 자리를 잡았다.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엄청난 역세권 아파트였다. 네 식구가 살기엔 너무나 작은 평수였다는 걸 제외하면 나쁘지 않았다.


좁은 집. 네 식구의 동선은 짧을 수밖에 없었고 사생활 보호가 불가능했다. 거실 겸 안방 하나, 작은 부엌 옆에 있던 좁은 화장실. 현관 앞 작은 방.


아빠와 엄마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잤고, 나와 동생은 거실 겸 안방에서 잠을 자던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 겸 공부를 이어가던 내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던 어느 오후.


"ㅎㅎ 정말? 나도 그래."


작은 방에서 새어 나오는 아빠의 전화통화 소리.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빠는 꽤 상냥했고 다정했다.


우리가 10대 때, 중학생 때나 들어봤던 목소리. 아니 어쩌면 그때 우리에게 건넨 말들보다 더 상냥한.


여자일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상대의 목소리가 방문 밖으로 들렸던 것도 아닌데, 난 왜 그가 여자라고 단정 지었을까.


그리고 이후 몇 년이 지나, 그 작은 집의 보증금을 빼 갑자기 너무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빠가 그 집의 보증금을 빼서 일부를 쓰고, 알 수 없는 경로로 얻게 된 돈으로 좋은 집에 월세로 들어갔던 거였다.


좋은 집은, 좋은 집답게 월세가 세 자릿수에 달했다.


"응, 뭐 해 ㅎㅎ? 잘 쉬고 있어?"


그리고 그 좋은 집에서도 종종 방문을 타고 아빠의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론 웃기도 했고, 가끔은 속삭이기도 했다.


한 번쯤 그냥 물어볼 걸 그랬나, 싶지만 그때로 돌아간다 한들 내가 어찌 물어보겠나.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까. 아빠는 지방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집을 떠났다. 처음엔 종종 집에 왔고, 엄마와 함께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빠는 종종 연락만 해왔고 직접 만나는 횟수는 줄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시간이 흐른 지금, 아빠와는 1년에 한두 번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어쩌면 지금으로부터 8년 전쯤, 어느 날의 오후. 그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아빠에게 따져 물었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 가족의 형태는 지금과 다를 있었을까.


조금은 무책임하면서도 어떤 이유에서든 가족을 등지고 떠난 아빠의 모습에, 어린 시절 한 없이 다정하고 든든하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런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남자든 여자든 언제든 저렇게 돌아설 수 있음을. 언제든 마음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잘못도 아빠의 잘못도, 그렇다고 나와 내 동생의 잘못도 아니지 않나.


그냥 사람이 그러한 것이리라 생각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남 또한 나에게 큰 상처만 남기고 떠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애초에 상처조차 주지 않을 관계쯤으로 살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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