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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27. 2024

용돈을 받는 가장들

매달 새롭게 다짐하면서 실패하는 일이 있다.


체크카드를 써보는 것.

은행 계좌를 만들 때 세트처럼 발급받은 체크카드는 이미 여러 장이다. 체크카드를 많이, 자주 쓰던 건 학생 때다. 모아둔 돈을 계좌에 넣어놓고, 현금 대신 체크카드를 썼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신용카드를 썼다. 체크카드와 달리 이것저것 혜택이 많았고, 상품마다 제공하는 혜택도 제각각이라 이 카드, 저 카드를 하나 둘 만들었다.

매달 25일, 월급이 들어오지만 그날 오후면 그중 대부분이 카드사로 빠져나간다. 매달 25일은 월급날이자 신용카드 대금 결제일이니까.

‘다음 달부터는 체크카드를 좀 더 써보자.’

월급이 계좌를 스쳐 지나가는 게 보기 싫은 마음에, 체크카드로 잠시 눈을 돌린다. 하지만 체크카드는 일단 계좌 안에 돈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현금이 있어야 그걸 계좌에 넣어두고, 체크카드로 ‘빼서’ 써야 한다.


그런데 늘 체크카드를 쓰자고 결심을 하는 날은 매달 25일 오후. 이미 계좌에 들어온 월급은 나를 스쳐 카드사로 넘어간 다음이다.


그렇게 매달 25일을 기점으로 하루 이틀, 내 머릿속을 자리 잡다가 사라진다. 그런 ‘체크카드’ 이야기가 회사 상사의 입에서 나왔다.


“이번 달엔 축의금 낼 일이 있어서 10만 원 더 받았어.”

응? 무슨 소리지? ‘축의금이 낼 일이 있어서’까지는 알아들었는데, 그래서 ‘10만 원 더 받았다’는 건 뭐지? 누구에게 어떤 돈을 받았다는 건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끔 뒷짐을 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훈수를 두거나 큰소리치던 상사는, 아내에게 매달 30만 원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그 달엔 결혼식을 갈 일이 있어 축의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축의금 10만 원을 더해 총 40만 원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상사의 아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엔 일을 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들이 커가면서 일을 그만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는 남편의 월급이 나오면 일부는 생활비로, 일부는 아이들 학원비로 썼다. 또 일부는 모았고, 일부는 남편에게 용돈으로 줬다.


가정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돈 관리’는 한 사람이 도맡는다. 그게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담하거나, 둘이 공동으로 한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상사도 마찬가지였다. 상사의 집에선 돈 관리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 원의 월급을 받고 나서, 30만 원의 용돈을 받았다.

“지난달엔 아예 펑크 났었어.”

결혼식이 많은 달도 아니었는데, 이래저래 쓰다 보니 30만 원을 다 썼다는 얘기다. 그래서 5만 원인가, 더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말일엔 회사에서 커피를 마시고, 구내식당을 갔다고 했다.


용돈은 그런 거다. 있는 만큼 쓸 수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다른 곳에서 돈을 아예 안 쓰거나 혹은 더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게 용돈이다. 회사에선 ‘떵떵 거리는’ 그가 집에서는 ‘찍 소리도 못하는’ 존재라는 게 쌤통이면서도 씁쓸했다.


회사에서 여러 상사들을 만나면서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건 한 손에, 아니 한두 손가락에 꼽는다.


그러니, 매달 30만 원 용돈을 받지만 결혼식이 많은 달엔 40만 원을 받는 그 상사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 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래도 씁쓸했다. 참 꼴 보기 싫은 상사지만, 그는 왜 집에서 용돈을 받으며 5만 원, 10만 원이 부족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따로 쓰시지 그랬어요.”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을 만나며, 초반에 4~5년은 각자 알아서 돈을 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일종의 ‘공금’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그렇게 ‘커플통장’을 만들었다. 매달 10만 원씩, 총 20만 원을 넣어두고 체크카드로 계산했다.

상사가 받은 월급에서 얼마, 아내가 가지고 있는 돈에서 얼마씩 떼어 계좌에 넣어두고 쓰는 건 불가능할까?

“와이프는 일 안 하잖아.”

아이러니다. 그의 ‘와이프’는 아이를 낳기 전 사회생활을 했다. 분명 돈을 벌다가, 아이를 낳고 기르느라 경력이 단절됐다. 상사의 아내는 이제 와서 일을 하기도 어렵고, 아직 아이들이 대학도 가지 않은 터라 돌봐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생활비를 비롯해 가정에서 쓰는 ‘돈’에 상사 얼마, 아내 얼마 각출할 수가 없다는 거다.

그래, 오케이. 규칙적인 벌이가 없으니 매달 돈을 각출할 수 없다는 부분은 이해한다. 하지만 매달 가정에서 쓰는 ‘돈’의 전부를 가져오는 상사가 체크카드로 30만 원씩 쓰는 부분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쓸 땐 쓰는 것도 리프레시가 되는데, 슬프네요.”

늘 큰소리치던 상사는, 머뭇거리다 그냥 웃었다.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슬픈 일 같다, 뭐가 슬퍼~ 그냥 사는 거지.”

상사는 씀씀이가 헤플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이 친구, 저 친구에 돈을 쉽게 빌려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 월급을 온전히 갖고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50만 원 100만 원짜리 물건을 턱턱 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물론, 월급 이외에 비상금으로 수백, 아니 수천만 원 쌓아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그래도, 그가 한 달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30만 원이라는 건. 어쩌다 돈을 다 쓰면 며칠 아내에게 졸라야 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힘들었고, 씁쓸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그는 회사에서 뒷짐을 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훈수를 두거나 큰 소리를 친다.

‘아우 씨, 또 저러네.’

아주 꼴 보기 싫어서, 어디 오물 주머니라도 있으면 홱 던져버리고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로 뒤덮인 그를 보며 속으로 낄낄대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 문득, 그가 회사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되새겨본다. 어쩌면 집에서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겠구나, 그래서 회사에 와서 저러는구나 싶었다.


5만 원이 없어, 요리하는 아내에게 넌지시 몇 번 말을 던져봤을 상사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벌었는데, 5만 원도 못 줘?!”

물론, 막상 집에서도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안하무인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동정심이 솟구쳐, 평소 오물을 던져버리고 싶은 상사에게 안타까움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닌데 말이다.


나도 그와 같은 직장인이고, 나의 남자친구도 그와 같은 직장인이다. 우린 매달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한 달을 산다. 거기서 동질감을 느낀 거다.


한 때, 집을 떠난 아빠를 대신해 우리 집의 생활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시기가 있었다. 당시 회사의 월급은 200만 원이었다. 월세를 비롯한 생활비로 쓰는 돈은 100만 원 정도였다. 온전히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50만 원 정도, 나머지는 저금을 했다.


그래서 안다. 돈을 벌고도 돈을 번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분이 돈을 버는 나를 얼마나 잡아먹는지도.


거창할지 몰라도, 나는 그게 존엄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줘야 한다. 돈을 벌고도, 제 돈처럼 쓸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게 맞나’ 싶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 때, 옆에 있는 남자친구를 돌아봤다.


어쩌면 그도 먼 미래에 존엄성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우린 각자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지켜줘야 할 건 지켜줘야 한다.


언젠가 나도 그에게 딱 30만 원어치가 들어있는 체크카드를 들이밀지 않을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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