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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May 06. 2024

밥솥이 되라는 건가요

(밥솥은 죄가 없어요.)

회사의 한 임원이 나와 내 동기들과 오랜만에 밥을 한 끼 하고 싶다며 만든 자리. 그 누구도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동기애’로 자리를 지키러 나왔다.


당시 우리 동기들은 대부분이 미혼이었다. 기혼은 딱 두 명. 2년 전 결혼을 한 남자동기와 몇 달 전 결혼을 한 여자동기가 전부였다. 남자동기는 육아휴직 기간이었던 터라 함께하지 못했고, 몇 달 전 결혼을 한 여자동기는 우리와 함께였다.


남자동기의 아내는 결혼 전까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결혼과 동시에 출산과 육아를 도맡느라 공부를 놓은 상태였다.


“강현이는 제 와이프한테 정말 잘해야 돼.”


오지도 않은 남자동기의 이야기를 꺼낸 건 임원이었다. 와이프가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있으니 잘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그놈 대견하지, 같이 육아하는 거잖아.”


틀린 말도, 뭐 이상한 얘기도 아니니 그냥 듣고 넘겼다. 동기들 중 몇몇은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문득, 이 놈이 선의로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불현듯 깨달은 순간.


“그래서 넌, 일 그만두는 건 아니지?”


동기 중 몇 명은 조금 더 고개를 숙여 밥을 먹는 척했고, 몇 명은 애써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그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전혀요! 그럴 생각 없어요.”


몇 달 전 결혼한 여자동기는 전혀 아니라며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애써 미소를 띤 채로.


“지연이도 그랬고, 몇 년 전에 누구였더라… 여하튼 그런 애들이 있었어.”


집에서 애를 보고 있을 남자동기의 이름을 꺼낸 것도 모자라, 각자의 사정으로 일을 그만둔 여자 선배의 이름을 불러왔다. 심지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심지어 본인의 기억 속에도 어렴풋이 남은 이름 모를 여자 선배의 존재까지 끌어왔다.


결혼을 하면 애를 낳는데, 그러다 보면 여자 후배들은 모두 회사를 그만두더라는 얘기였다.


“사실 남자 후배보다 여자 후배들이 일은 더 열심히 하고 잘했는데, 선배로서 너무 아쉽지.”


모두가 애써 고개를 끄덕일 때. 네 놈이 정말, 그걸 아쉬워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안면, 아니 온몸으로 뿜어내는 나의 기운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넌 어떻게 생각해?”


올 게 왔다.


“결혼해서 관두는 게 아니죠. 각자 사정 때문인데, 그 사정들 알고는 계세요?”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강약약강이다. 이놈도 딱, 강약약강이다.


“허허, 그래? 아 결혼 때문이 아니었어?”


나와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건지, 갑자기 대화를 맺더니 술을 섞었다.


그렇게 몇 잔의 술과 몇 점의 음식을 더 먹었을 때쯤,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성은이 넌 밥은 할 줄 아냐?”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여자동기에게 또다시 화살이 돌아갔다. 여자동기는 심성이 고왔다.


“저 요리 잘해요~ 밥은 당연히 하죠.”


가끔 마음의 소리가 마음에 있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올 때가 있다.


“결혼하면 다 밥 잘해야 되나요?”


‘킥’ 동기들 사이에서 누군가 웃었다. 나와는 대각선 저 끝에 앉아있던 동기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 동기는 나에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참으라는 뜻이었다.


“아니~ 요새 워낙 밀키트 이런 게 많잖아. 쉽게 쉽게 하지 요리들을.”


“요리 쉽게 하면 안 되는 건가요?”


“밥은 기본이니까, 그건 할 줄 알아야지. 너 남자친구랑 오래 만났지?”


결국 이 놈은 회사 바깥사람, 남자 친구까지 이 자리에 불러들였다.


“밥은 밥솥이 하죠~ 남자들 밥 때문에 결혼하는 거면 밥솥이랑 결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불붙는 나의 마음을 애써 ‘아니에요?’로 귀엽게 끝맺으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동기를 툭 쳤다.


“야, 너 나중에 밥 얻어먹으려고 결혼할 거냐? ㅋㅋㅋ 그럴 거면 밥솥이랑 해라?”


몇 잔의 술과 몇 점의 음식을 더 먹고 또 먹고 더 먹은 뒤 자리는 끝났다.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와 유아기, 청소년기를 보낸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똑같이 지내고 대학에 들어간다.


물론 고등학교를 3년 다니기도 하고, 검정고시를 치기도 하고. 대학을 2년 다니기도 하고 4년 다니기도 하고 그 이상 다니는 경우도 있다.


상황에 따라 고등학교를 아예 안 가기도 하고 대학을 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는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의 차별을 받지 않는다.


나도, 내 옆자리의 남자동기도, 그날 회식 때 오지 않은 육아휴직 중이던 남자동기도, 결혼한 지 몇 달 안 됐던 여자동기도, 그리고 그 자리를 마련한 그 임원도 모두 4년제 대학을 나왔다.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는 남자는 ‘대견’하지만, 결혼을 하고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여자는 ‘잠재적 퇴사자’로 보는 그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줄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그만둔 여자가 걷고 있는 길이 당연한 일 중 하나로 여겨질 거라는 생각에 이르니 조금은 역겨웠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안다. 크게 마음 쓸 필요도,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사람들이, 나보다 그 이전에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해 본다.


안다. 그가 날 ‘예비 밥솥’으로 여기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과 행동을 넘길 순 없었다. 그의 앞에서 ‘잠재력 있는 여자동료’가 아닌 ‘예비 밥솥’ 취급을 받게 될 후배들이 수두룩할 거란 생각에. 계란이 되어 바위를 쳐야겠다 싶었다.


“아줌마 되더니 진짜 달라졌어!”


종종 상사들이 여자 선배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줌마’는 대체 어떤 존재이며, 그럼 그 여자 선배는 결혼 전과 후가 어떻다는 건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안다. 어떤 의미였는지. 웃자고 한 소리지.


하지만 나도 함께 웃으면, 내 뒤에 있을 무수히 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아직 만나지도 못한 미래의 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조금은 미안하단 생각에. 애써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그 길을 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런 인식을 깨면 되는 건데, 결혼을 하고도 스스로를 높이면 되는 건데, 밥솥이 될 리가 없으니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 되는 건데.


유부남과 유부녀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회사 상사들의 말과 행동에 홀라당 빠진 건 아닌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웃기고 어리석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의 난, 여자로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별 것도 아닌 말에 부르르르! 열을 내며 대꾸하던 나의 지난날들을 글로 써보니 좀 웃기고, 귀엽다. 그로부터 3년 여가 지난 지금, 남편과 부엌에서 '함께' 지지고 볶으며 집밥을 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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