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은 죄가 없어요.)
오지도 않은 남자동기의 이야기를 꺼낸 건 임원이었다. 와이프가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있으니 잘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집에서 애를 보고 있을 남자동기의 이름을 꺼낸 것도 모자라, 각자의 사정으로 일을 그만둔 여자 선배의 이름을 불러왔다. 심지어 우리는 전혀 모르는, 심지어 본인의 기억 속에도 어렴풋이 남은 이름 모를 여자 선배의 존재까지 끌어왔다.
모두가 애써 고개를 끄덕일 때. 네 놈이 정말, 그걸 아쉬워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으며 그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안면, 아니 온몸으로 뿜어내는 나의 기운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와 유아기, 청소년기를 보낸다. 초등학교 6년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똑같이 지내고 대학에 들어간다.
상황에 따라 고등학교를 아예 안 가기도 하고 대학을 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는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의 차별을 받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는 남자는 ‘대견’하지만, 결혼을 하고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여자는 ‘잠재적 퇴사자’로 보는 그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사람들이, 나보다 그 이전에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해 본다.
하지만 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과 행동을 넘길 순 없었다. 그의 앞에서 ‘잠재력 있는 여자동료’가 아닌 ‘예비 밥솥’ 취급을 받게 될 후배들이 수두룩할 거란 생각에. 계란이 되어 바위를 쳐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도 함께 웃으면, 내 뒤에 있을 무수히 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아직 만나지도 못한 미래의 많은 여자 후배들에게 조금은 미안하단 생각에. 애써 미소조차 띠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