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시간은 흐른다

by 남산

'끓는 물 속의 개구리' 이야기는 워낙 유명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깜짝 놀라 뛰쳐나오지만 (사실 그냥 삶아지지 않을까?), 서서히 데워지는 물에 넣으면 위험한 줄 모르고 있다가 죽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인생살이가 다 서서히 끓는 물 속에서 사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것도 그렇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서 남몰래 운 적도 많지만, 지나고 나면 기억은 흐릿해지고 '그럭저럭 할 만한 것 같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 음... 말하고 보니 앞의 말을 수정해야겠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아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산부인과 의사로 계속 일해야 하나, 아니면 전부 관두고 새 출발을 해야 하나 자신에게 수백 번은 물어본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병원 밖 계절이 한 바퀴 지나갔다. 아무래도 난 또 우유부단하게 김보미 선생님과 함께 일할 것 같다. 다만, 내년이 올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짠~! 축하해 산이야! 너 아래 연차 후배 생겼다! 잘 챙겨주렴. 저번에 여기서 인턴 근무하고 갔던 박하윤 알지? 걔가 인사하러 온대!"


"네? 정말요? 걔는 어쩌다가 산부인과를 선택했대요?"


"너는 참! 에효... 너는 그냥 하윤이랑 얘기 금지야! 안 좋은 말만 하려고 그러지?"


보미 선생님이 투덜거렸다. 우리는 하윤 선생님을 맞이하기 위해 당직실을 부랴부랴 정리했다. '어차피 곧 어질러질 걸 하윤 선생님도 알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군말하진 않았다. 보미 선생님이 등 뒤로 말했다.


"인제 와서 하는 얘긴데 말이야... 너도 참 고생 많았다. 솔직히 난 너 산부인과 그만둘 줄 알았거든. '아~ 길어봤자 얘는 한두 달이다' 하고 말이야. 그래서 별 기대도 안 했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네. 어쩌면 나도 혼자서는 계속 일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네가 들어와 일을 분담해줘서 그나마 버틴 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걸 보고 다행히 새로운 전공의도 들어왔고. 이렇게 앞으로 후배들이 계속 들어올 수 있겠지?"


'선생님 저 아직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있어요...'


라고 생각했으나 여기서 이렇게 대답하는 건 눈치 없는 거겠지.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대답은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뿐이었다.


아직 정리를 마치지 않았는데, 누군가 당직실 문을 두드리면서 열고 들어왔다. 하윤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와! 반가워! 하윤아!"


보미 선생님은 하윤이를 손뼉을 치며 환영했다. 두 여자의 시끌벅적한 대화에 나는 영 참여하기 어려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윤아 산이는 알지? 기본적인 업무는 산이가 데리고 다니면서 알려줄 거야. 잘 보고 배우렴!"


"네넵! 잘 부탁합니다~!"


하윤은 막내라서 그런지 보미 선생님과 다른 분위기로 쾌활했다. 산부인과가 원래 그런 털털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떤 위급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내게는 없을 그런 모습이 빛나 보인다. 하윤이에게 인사하려는데, 보미 선생님의 이상한 눈빛 신호를 느낀다. 아무래도 신입 전공의에게 기운 빠지는 소릴 할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지... 하하. 나도 그렇게까지 눈치 없이 우울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하윤아. 우리 서로 잘해 보자."

keyword
이전 09화미움받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