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산 Jul 26. 2023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너를 기다리며


얼굴은커녕 아직 이름조차 모르기에, 널 부르는 것조차 난 어색하기만 하구나. 하긴 내 성격이 워낙 내향적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너는 어떤 성격인지 모르겠으나 난 사람을 만나는 게 영 신경 쓰이는 일이 많고 피곤하더라. 널 만나는 것 또한 상상만으로도 벌써 긴장되는 것 같아. 그렇다고 너를 만나는 게 싫다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길. 그저 네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란다. 그래서 만나면 어떤 얘기로 첫인사를 하면 좋을까? 일단 지금은 이번에 출산한 성형외과 의사 선배와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이긴 하나 선배의 출산을 직접 받아준 건 아니란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고 축하드렸을 때 선배는 나를 의식했는지 적당히 예의상 하는 말을 해주었어.


"고마워. 마음 같아선 네게 진료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거리도 멀고... 또 아는 사이끼리는 뭐랄까 좀 민망한 게 있잖니. 너도 알다시피. 미안하지만, 이해하지?"


뭐랄까. 이해하고 자시고 간에 난 '역시'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어. 난 지인에게 진찰받아도 지인은 내게 산부인과 진료를 보지 않는 것. '당연히 이해하지만, 한편으론 약간 서운하고 직업에 자괴감 들 때도 있다'라는 것도 젊을(?) 때나 그랬지, 지금은 그냥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해졌으니까.


하지만 선배는 내가 여자였다면 진료를 볼 생각이 정말 있긴 했었던 것 같아. 임신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을 때마다 내게 종종 물어보곤 했어. 좀 자주 많이 물어보긴 했지. 덕분에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며 선배는 감사의 인사 겸 얼굴 한번 보게 밥 사주겠다고 했어. 그렇게 우린 오랜만에 다시 만났단다.


난 다시 한번 선배의 출산을 축하하며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어. 선배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지.


"아 말도 마라. 육아는 완전 지옥이야. 지옥! 전공의 때 병원 당직으로 일주일 밤을 새우곤 했을 땐 그나마 지금보다 나이가 젊기라도 했지! 다 늙어서 밖에선 일하고 집에선 애 본다고 잠 못 자니 부부가 둘 다 미쳐가는 것 같다! 하하하!"


아 역시 그런가. 유부남 친구들이 다들 비슷하게 말하곤 했던 게 있단다. "야 넌 절대 결혼하지 마라. 결혼하면 내 인생은 그걸로 끝이야. 끝!" 같은 조언들. 그렇게 경험자들이 꼭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결혼하면 뭔가 행복한 게 있는 것 같아서 다들 따라서 결혼하곤 하더라.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또 육아를 가지고 비슷하게 말하곤 해. "야 애 절대 가지지 마! 진짜 너무 힘들어! 제발 그냥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고. 심지어 이 얘긴 '소아청소년과' 의사 친구가 한 말이란다. 근데 이렇게 말하곤 몇 달 지나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바뀌더라고. 이러니 주변 사람들의 조언들이 신빙성이 없지. 아마 선배도 비슷하게 말하지 않을까?


"역시 애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군요. 아마도 전 영 글러 버린 것 같습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선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어.


"아냐! 난 아기를 딱 안을 때 깨달았어! '내 운명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말 들으면 서운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바로 너를 만나는 거였구나'라고.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 가고 성형외과 의사가 된 모든 노력이 다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던 거구나! 그런 느낌이 팍! 오면서 눈물이 나더라니깐?"


말하는 중에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선배를 보면서 난 솔직히 좀 당혹스러웠어. '어... 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진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 거지. 출산하면 호르몬이 뇌를 지배해서 사람이 감상적으로 변한다고 하지만, 선배는 호르몬 분비기관에 어디 구멍이라도 나서 호르몬이 홍수가 난 게 아닌가 싶었단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애를 키우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정상적인 반응인가 봐.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도 한번 상상해 보았어. 함께했던 수많은 출생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벌써 수백 건이 되어 다 기억할 수도 없을 정도야. 출산이라는 게 과정이 어떻고 얼마나 감동적인 분위기인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그런데 내 아이의 출산은 과연 느낌이 다를까?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어. 난 선배처럼 '사랑으로 널 낳았다!' 같은 낯간지러운 말은 못 할 것 같아. 어쩌면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영화처럼 무덤덤할지도 모르지. 누군가에겐 인생에 한두 번밖에 없을 감동을 난 수백 조각으로 쪼개어 먼저 태어난 생명에게 선물로 주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나중에 너를 만날 때 감동이 조금 밖에 안 남아있으면 어쩌지?'라고 괜히 걱정되기도 해.


그래도 어렴풋이 짐작할 순 있는 게 하나 있어. 널 만나면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는 걸. 벌써 설렘이 싹트는 게 느껴지니 말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