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산 Jul 29. 2023

0주 1일. 근데 지금은 몇 주지?


산부인과에서 계산하는 임신 주수는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흔히 착각하기 쉬운 '수정일' 기준으로 계산하는 방식을 틀렸다고 말할 순 없다. 어디까지나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의대에선 두 가지 방식 모두 배운다.


의학에서 태아를 연구하는 학문이 크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산과학 (obstetrics), 그리고 발생학 (embryology)이다.


발생학은 수정란에서 개체가 발생 분화하는 과정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산과학은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두 학문은 다루는 시기가 비슷하게 겹친다. 그러나 둘은 엄연히 다르고 중요시하는 부분도 다르다. 발생학은 실험실이 연상되는 기초 학문이고, 산과학은 진료실이 생각나는 임상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발생학과 산과학은 임신 주수를 계산하는 기준부터 다르다. 발생학은 수정부터 시작으로 본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산과학에서 말하는 주수를 '임신 나이 (gestational age)'라고 하며 발생학에서 말하는 주수를 '배아 나이 (embryonic age)'라고 한다.


월경 주기가 28일(=4주)인 사람을 기준으로 배란은 월경 시작 2주 뒤 발생하므로 일반적으로 임신 나이와 배아 나이는 2주가 차이 나게 된다.


월경 시작        배란/수정

                        

├ 1주 ┼ 2주 ┼ 3주 ┼ 4주 ┼ 5주 ···

                        

임신 0주        발생 0주 (=임신 2주)


- 임신 나이 = 배아 나이 + 2주

- 산부인과에서 말하는 출산 예정일 = 40주

- 발생학에서 말하는 출산 예정일 = 38주


매우 간단한 계산이다. 그런데 의대생 때는 같은 시기를 놓고 다르게 말하는 발생학과 산과학 지식을 암기하기가 힘들었다.


의대 커리큘럼은 본과 1학년 때 우선 기준이 되는 인체의 구조와 기능, 기초 의학 이론을 배운다. 그리고 본과 2학년에서 각 임상 과목의 실전 지식을 배운다. 따라서 발생학은 1학년 때 배우고 산부인과는 2학년 때 배운다. 뭔가 어디서 봤던 게 1년 뒤 다시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발생학 교과서를 다시 펴보는 짓은 하면 안 된다. 익숙하지도 않은 발생학 지식과 산과학 지식이 서로 꼬여 주화입마에 빠져버릴 수 있으니 착실한 의대생은 주의하도록 하자. 발생학을 배울 땐 발생학만 뇌에 넣고 시험이 끝나면 산부인과를 위해 비우는 게 좋다. 약간의 알코올이 도움을 줄 것이다.


의대생을 힘들게 했던 또 다른 문제는 발생학 내에서도 임신 나이와 배아 나이를 혼용하여 사용한다는 것이다. 발생학은 실험실에서만 볼 수 있는 초기 배아 시기엔 착실히 배아 나이를 따라 서술하지만, 초음파로 볼 수 있는 태아 시기가 되면 상황이 혼란스러워진다. 초음파 주수는 임신 나이이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초음파를 봤는데 산모가 알고 있던 주수와 2주나 차이 날 순 없지 않은가?


발생학을 배울 때 자연스럽게 시간 순서를 따라가는데, 이러한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 '그래서 이게 도대체 몇 주인 거야?'를 묻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되냐고? 그냥 주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차피 이해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하나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뺏겨 아홉을 놓치면 시험에서 탈락하므로, 차라리 그 시간에 다섯을 암기하는 것이 의대 생존의 비결이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신기하게도 훗날 '아 그게 이런 거였구나!'라고 깨달을 때가 온다.

이전 02화 0주 0일. 아니 벌써 임신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