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조그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창을 열고 산을 바라봅니다. 비의 빗금이 사선이 되어 내리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바닥 사이로 비가 허둥대며 선을 긋는 중입니다. 시선을 멀리 하늘과 숲을 향하니 빗살들이 난무합니다. 춤추는 물빛 빗살이 눈살처럼 보입니다. 진눈깨빈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는 소리로 오지만 눈은 고요로 옵니다. 비는 소리로 발자국을 전하지만 눈은 색으로 발자국을 전합니다. 서로가 많이 다른데 왜 불현듯 눈이 떠올랐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의 심사가, 더울 때는 추울 때가 그립고 추울 때는 따뜻할 때가 그립기 마련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방안까지 비가 내리는 것'같아서일지도요.
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별과 그리움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일제치하의 시대를 생각하면 분명 다르게 읽힐 시이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빛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하얀 눈의 세상. 가고 싶어도, 찾고 싶어도 지도에서조차 하얀 그녀의 행방. 빈방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그리움만 넘실넘실 방을 채웁니다. 어떻게라도 해보고 싶지만, 어떤 것으로도 해볼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도, 내 나라도 자꾸만 흰 눈으로 덮여만 갑니다.
차라리 하얀 눈이었으면 좋았을까요.
비 내리는 날, 자꾸만 빗살 따라 삐딱하게 흔들리는 딱히 이름 붙일 수 없는 무명의 감정들만 소용돌이로 곁을 감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