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지겹고 애틋한
미국의 4분기는 거의 축제다. 10월 말의 핼러윈, 11월 말의 추수감사절, 그리고 크리스마스까지. 가을이 오면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축제 모드'로 접어들어, 9월부터 현관문 리스나 마당의 장식품을 가을 분위기가 나게 바꾸고, 늦어도 10월 초에는 핼러윈 장식을 시작한다. 핼러윈 장식을 걷어내고 나면 추수감사절 장식이 등장하고, 추수감사절 연휴 마지막 날부터는 슬슬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 특히,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까지는 온 동네 사람들의 발이 땅에서 1인치쯤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이런 미국식 계절감에 조금은 익숙해져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가을을 알리는 '펌킨(Pumpkin) 스파이스 음료'가 나오기 시작하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한다. 반쯤은 설렘으로, 반쯤은 또 다른 감정으로.
어느덧 9월, 한낮은 여전히 덥지만 저녁 무렵의 바람은 확실히 결이 달라졌다. 텍사스에서의 네 번째 추수감사절이 다가오고 있다.
추수감사절 음식 하면 당연히 터키(Turkey), 칠면조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1월 마지막 목요일인데, 그래서 11월 초쯤 되면 마트에는 꽁꽁 언 칠면조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 년에 소비되는 칠면조의 85%, 약 4천6백만 마리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판매된다고 하니, 일 년 내내 냉동고에서 꽝꽝 얼어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 칠면조들은 크기에 따라 '귀여운' 4 파운드(약 2kg) 짜리부터 24 파운드(12kg)까지 다양해서, 큰 것은 추수감사절 1주일 정도 전부터 해동을 시작한다. 냉장실에서 천천히 해동해야 하기 때문에, 마을 커뮤니티 페이*북에는 "당신이 n 파운드짜리 칠면조를 샀다면 이제 냉장실로 옮길 시간입니다."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솔직한 이야기로 칠면조는 썩 맛있는 고기는 아니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콜레스테롤과 칼로리가 낮아 몸에 좋다고 하는데, 좀 심하게 몸에 좋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매우 퍽퍽하다. 시간 맞춰 해동해서 버터를 듬뿍 바르는 것도 조금이라도 덜 퍽퍽하게 칠면조 요리를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날, 이웃들끼리 수다를 떨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칠면조 지겨워. 누가 나에게 치킨 파스타 좀 줬으면 좋겠어. 치킨이 훨씬 맛있다고!"
"맞아, 게다가 우리 시어머니는 언제나 너무 큰 칠면조를 구우셔. 남은 것은 다 싸 주셔서, 추수감사절 지나고 나면 2주 동안 점심으로 터키 샌드위치만 먹어야 한다니까.”
여기는 한국의 명절처럼 며느리들만 전을 부친다거나 차례상을 차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지만, 여기 며느리들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시어머니가 잔뜩 만들고 싸 주는 데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는 사실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버린 나는 너무 얄팍한 인간일까. 이제는 더 이상 예전만큼 귀하지도 않고 그보다 맛있는 것도 넘쳐나지만 ‘그래도 명절에는 이런 걸 먹어야 한다’라고 우기는 어른들, 애초에 지나치게 많이 요리해 놓고 다 먹으라고 계속 권하고,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쳐도 한가득 음식을 싸 주시는 어른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사람 사는 것은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의 추수감사절 중 한 번은 한인교회 장로님 가족이 우리 가족을 비롯한 몇몇 가족을 초대해 주셔서, 우리도 여기의 추수감사절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느껴볼 기회가 있었다. 커다란 칠면조 구이, 그 칠면조만큼 커다란 햄, 그레이비소스와 크랜베리 잼과 펌킨 파이까지.
“솔직히 칠면조보다 햄이 더 맛있지.”
“근데 또 칠면조를 안 먹으면 왠지 섭섭하거든! 하하하.”
여러 가족이 왁자하게 모여서 먹으니 꼭 한국의 추석 명절 같았다. 사실 시기적으로 조금 더 겨울에 가깝고 음식의 종류가 다를 뿐, 추수감사절이 미국판 추석이지, 뭐.
연세가 있는 이민 1세대 분들은 남은 칠면조를 뼈째 푹 끓여 한국식 닭죽처럼 해 드시는 경우도 많다는 말씀에 웃음이 빵, 터졌다. 사람 사는 것이 어디나 비슷하지만, 특히 '한국' 사람 사는 것은 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가을이 시작되면, 온 마을 가득 일렁이기 시작하는 축제 같은 분위기에 설레기도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세상천지에 우리 식구 넷 밖에 없는 듯하여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명절은 좋아하기만 할 수는 없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기름진 음식,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다정하지만 무례한 오지랖, 그리고 며느리의 의무나 형제간의 도리 같은 것들.
하지만 이 시기, 대가족이 모일 준비를 하는 이웃집들을 보면 조금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명절이란 있으면 지겹고 없으면 그리운 것인가 보다.
물론 정작 한국에 가면, 그런 애틋한 감정은 다 까먹고
“아 엄마! 요즘 누가 고기 못 먹고 산다고, 요즘은 비만이 더 걱정이야, 그만 좀 먹으라고 하세요.”
“어머니, 저 진짜 배불러요. 그거 진짜 조금만 싸주세요. 아뇨 아뇨, 진짜 다 못 먹어요.”
라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지금은 그 지겨운 안락함과 배부름이 그리운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