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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에게 드리는 쿠키

어린이를 '지켜 주는' 사회

by 앤지
이 글은 산타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주변에 있다면 읽는 데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래전, 내 부모 또래의 누군가가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즘은 어린이날이 필요가 없어. 옛날에나 어린이날이 필요했지, 요즘 애들은 부족한 것 없이 365일이 어린이날인데 무슨 어린이날이 따로 필요해?"

나한테 하신 말씀은 아니고 아마 어른들끼리 이야기 중에 반쯤 농담 삼아 나온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어린이였던 나는 내가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에도 어린이날이 필요 없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가 없어서 속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미국에 온 지 몇 달 정도 된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그 어른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미국 애들은 어린이날이 필요가 없겠어. 여기는 완전 어린이 천국인데?"

미국 어린이가 들었다면 속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은 정말로 내 눈에는 어린이가 살기 참 좋은 나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운전자가 어린이를 보면, 자신의 진행방향과 무관해 보여도 일단 차를 멈추거나 속도를 늦춘다. 어린이는 워낙에 예측되지 않는 존재이자 약자이기 때문이다. 보통 열다섯 살이면 첫 운전대를 잡는 자녀들에게 부모는 "어린아이가 보이면 무조건 멈춰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우리 마을 같은 경우에는 어린이가 보이는데 속도를 늦추지 않고 지나가는 차량이 있으면 "아직 운전이 미숙한 십 대인가?"하고 수군대고, 순발력이 좋고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마을 커뮤니티 페이*북 페이지에 번호판을 가린 해당 차량의 사진과 함께 "만약 당신의 자녀라면 주의를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어른들의 바쁨은 어린이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앞서지 못한다.


핼러윈 데이가 되면 아이들은 Trick or Treating을 나선다. 어른들은 차고를 열어두고 핼러윈 의상을 갖춰 입고 사탕을 한가득 준비한 채로 어린이 손님을 기다린다. 사정이 있어 직접 나눠주지 못하는 사람은 사탕이 가득 담긴 보울을 현관에 놓고 불을 켜 둔다. 작년에는 코비드로 Trick or Treating이 아무래도 좀 위축되었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사탕을 장난감 RC카 트렁크에 담아다 주거나 끝이 뽁뽁이로 된 장난감 화살에 매달아 쏴 주는 등 재미있는 방법을 고안하는 이웃들도 등장했더랬다.

코비드로 락다운이 시행되었을 때도 어른들이 가장 먼저 고민한 것들 중 하나는 '어린이들의 즐거움'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동네 산책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현관 쪽 창가에 각종 동물 인형들을 놓아두었다. 지나가는 어린이들이 '탐험'하는 기분이라도 느껴보라는 것이었다.


내가 한동안 즐겨 보던 미국 드라마 <제인 더 버진(Jane the Virgin)>의 어느 회차에서 드라마 시작 전에 갑자기 경고문이 나왔다.

"이 드라마는 투스 페어리(Tooth Fairy)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주변에 있다면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곳 아이들은 이가 빠진 날 밤에 베개 밑에 빠진 이를 넣어두고 자면 투스 페어리가 와서 용돈이나 작은 선물을 주고 간다고 믿는데, 그 회차에 엄마가 투스 페어리로 분장하는 장면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밤 9시 넘어서 하는 드라마였기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을 터였지만, 여하튼 이곳이 어린이들의 꿈과 상상을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이것까지만 해도 '드라마'니까, 말하자면 '말랑말랑한' '허구를 다루는' 프로그램이니까 놀라움은 좀 덜했다.

그러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닥터 파우치(Dr. Fauci) 미 국립 전염병 연구소장이 TV 뉴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산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고, 다행히 그가 코비드에 면역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산타는 자가격리 규정을 적용받는 일 없이 선물을 배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감동인 것은, 앵커가 진지하게 질문을 먼저 했고 파우치 박사는 그에 대답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눈을 찡긋찡긋 한다거나 뭔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시종 진지했다. 방송이, 그것도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뉴스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할애하여 어린이의 꿈과 상상을 지키기 위한 질의응답을 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라고 감동했다.


아동 성착취물의 제작이나 배포뿐 아니라 단순 소지만으로도 수십 년 징역형이 선고되고 신상이 공개되는 것까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린이 보호를 법률로 규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생활 속 곳곳에서 어린이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안전과 생명에 대한 보호뿐 아니라 꿈과 상상의 세계까지도 존중하는, 진정 어린이를 '지켜 주는' 사회. 미국이라는 사회가 완벽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고 이곳에도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어린이가 없지 않겠지만, 전반적인 생활 문화 속 어린이의 보호와 존중이라는 면에서 앞서가는 나라임은 분명해 보인다.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이곳 어린이들은 집 앞에 쿠키와 우유 또는 핫초콜릿을 놓아두고 잔다. 산타와 루돌프에게 간식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오시던 산타는 간식을 드시는 것까지는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지만, 산타가 바쁠 테니 간식은 놔도 되고 안 놔도 되는 거였다고 설명했더니 납득했다. 그리고 한 번은 우리도 간식을 놓자고 했다. 나와 남편은 오밤중에 집 밖으로 나가 차 트렁크에 숨겨 두었던 선물을 살금살금 집어 오는 것도 모자라 다 식은 핫초콜릿과 쿠키까지 처리해야 했다.

물론 여기 아이들 중에도 산타를 믿지 않는 아이들은 있다. 중학생쯤이면 대체로 진실을 알아차리고, 종교가 다르거나 부모의 가치관이 다른 집은 애초부터 “우린 산타 안 해(We don’t do Santa.)”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진실을 알게 된 큰 아이들은 어린 형제자매들을 위해, 산타 이벤트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웃들을 위해 절대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 집도 이제 큰아이는 산타의 진실을 알고 있다. 일이 년 내로 둘째까지 알게 되면 더 이상 문 앞에 쿠키를 내놓았다가 몰래 먹어 치우는 것도, 선물을 남편 회사로 배송시켜 며칠씩 숨겨두는 것도 그만 해도 될 것이다. 그 ‘첩보 작전’을 더 이상 안 해도 된다면 한 편으로 속이 시원할 것 같기도 하지만, 또 무척 아쉬울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산타가 별일 없이 잘 오실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가 좀 가라앉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이미 변이에도 효과가 있는 백신을 누군가가 갖다 드렸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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