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을 먹으러 간다
한국 같으면 사 먹을 메뉴를 내가 자꾸 집에서 만들어 먹으니까, 내 글을 읽다가 ‘텍사스의 한식당이 많이 별로인가 보네.’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다. 다루는 메뉴가 많다 보니 각각의 메뉴가 전문점만큼 맛있기는 당연히 어려운 일이지만, 다양한 메뉴를 상당히 맛있게 만드는 곳이다. 아빠는 순두부, 엄마는 육개장, 딸은 제육볶음, 아들은 짜장면을 시키고 가운데 파전도 한 장 시켜서 나눠먹는 것을 할 수 있는, '어메이징' 한 장소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 가족이 한식당에 자주 가지 않는 이유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먹던 가격과 비교가 자동으로 되는 바람에 '엇, 비싼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조금은 있지만, 주요한 이유는 멀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는 한인마트가 그보다도 더 멀리 있어서 그래도 한식당을 한 번 씩 갔는데,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한인마트가 하나 더 생긴 후로는 재료를 사다 해 먹는 것이 더 쉽고 빠르게 느껴져서 한식당에 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새로 생긴 한인마트 근처에 하나둘씩 아시아 음식점이나 디저트 가게들이 들어서고 있는데, 한식당이 좀 여러 개 들어와 주면 좋겠다.
미국에 온 첫 해 5월 초, 아직 짐이 도착하지 않아서 남편 회사분들에게서 몇 가지 가재도구를 빌려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대충 장을 본 것들로 매우 간소하게 며칠간 식사를 하고 주말이 왔는데, 남편이 외식으로 한식당을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며칠간 먹은 것이 즉석밥에 샐러드, 고기구이, 달걀 프라이 같은 것들이라 제대로 차려진 음식이 그립기는 했다. 그래도 이제 미국에 온 지 1주일도 안 되었는데 한식당이라니.
"난 괜찮은데? 내가 3일짜리 해외 출장에도 한식당 모시고 가야 하는 임원도 아니구먼, 왜?"
하고 물으니, 아이들이 원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흠, 사실 본인이 먹고 싶은가 보군, 싶었지만 모른 척하고 다 같이 한식당에 갔다.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서버 아주머니가 밑반찬을 주러 오셨다. 어묵 볶음을 본 둘째가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건데!"라고 하자 아주머니가 "어머, 너 한국말 잘하는구나!"라고 칭찬하셨다. 약간 어리둥절해진 큰아이가 "저희 한국말밖에 못 하는데요?"라고 정직하게 말하자 아주머니는 깔깔 웃으시며, "그래그래, 영어는 앞으로 다 해. 한국말하는 게 중요한 거야. 한국말 절대 잊어버리지 마~?"라고 해주셨다. 그리고 어묵 볶음이 한 접시 가득히 서비스로 나왔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디저트로 나오는 식혜도 한 컵 씩 더 주셨다. 생각지도 못한 서비스와 한국말을 하는 것만으로 받은 폭풍 칭찬에 두 아이 모두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식당을 나왔다. 둘째가 귓속말로 나에게 속삭였다.
"엄마, 저 아주머니 되게 착하시다. 나 여기 좋아."
그 후로도 아이들은 한식당에 갈 때면 '한국말을 잘한다'는 이유로 칭찬을 종종 들었다. 한인교회에 나가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만 한 나이가 되면 한국말을 알아는 들어도 잘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덩치가 제법 되는 우리 아이들이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면, 서버 분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특해하시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저희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어요."라고 이실직고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들 격려해주시며 "그래그래, 한국말 잊지 마. 한국말 잘해서 너무 예뻐."라고 하셨다. 원래도 입에 맞고 친숙한 음식인데, 칭찬까지 받으니 아이들은 당연히 한식당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모처럼 외식을 해볼까 하고 "어디 갈래?"하고 물으면 거의 매번 짜장면 파는 데, 국밥 파는 데, 아니면 한식당이라고 콕 집어 대답했다.
"하아, 엄마는 기왕이면 엄마가 할 줄 전혀 모르는 요리, 엄청 색다른 요리, 이런 거 좀 먹어보고 싶거든?"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얼마 전, 둘째의 태권도 승단 심사가 있던 날이었다.
지난 몇 주간 열심히 노력해서 심사에 합격한 둘째에게 저녁 메뉴를 고를 기회를 주었다. 둘째는 최근 시내에 생긴, 솥뚜껑에 삼겹살을 김치와 함께 굽고 마지막엔 볶음밥까지 해 먹을 수 있는 오리지널 한국식 돼지 고깃집을 골랐고, 큰아이도 동생의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심사가 끝난 후 식당에 도착하면 이미 8시가 다 될 판이었지만, 아이들의 의지는 확고했다.
우리끼리 대화를 하면서 "오늘은 ㅁㅁ이가 주인공이니까"라고 하는 것을 들으신 서버 아주머니가 "오늘 생일이니?"하고 물으셨다. 둘째가 쑥스러워하며 "아니요."라고만 하길래, 팔푼이 엄마인 내가 냉큼 끼어들어 "오늘 태권도 3단 땄어요!"라고 자랑을 했다.
서버 아주머니는 "어머, 그래요? 그러고 보니 태권도 잘하게 생겼네!"라시며 고기를 굽는 내내 폭풍 칭찬을 날리셨다. 어깨도 딱 벌어지고, 아주 다부지게 생겼고, 딴딴하게 생겼고, 등등. 사실 보통 체격의 아홉 살 아이이지만, 말씀만 들으면 이소룡쯤 되는 것 같았다. 둘째의 입이 귀에 걸렸다.
미국인들의 어린이에 대한 칭찬은 어마어마하다. 원래도 감정 표현에 후하고 온갖 형용사 사용에 능한 사람들인 데다 아이들에게 유독 관대한 문화까지 더해져, 우리 아이들은 한국 기준으로 보면 다소 오버스럽기까지 한 칭찬의 말을 일상으로 듣고 산다. 인사만 잘해도 "Sweet"하다고 하는 것은 물론, 길을 건널 때 좌우 확인을 잊지 않으면 "Great!" 소리를 듣고, 넘어졌다가 툭툭 털고 일어나기만 해도 "Super tough"하고 "Brave"하다는 격려를 들으니, 어지간한 칭찬에는 별 감흥이 없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한국어를 잘한다거나 태권도를 잘한다는 이유로 듣는, 한국어로 된 칭찬의 느낌은 좀 각별한 데가 있다. 그냥 기특해하고 귀여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꼭 손주에게 덕담을 해주시는 것 같은 따뜻함, 한국의 것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애틋함이 함께 느껴지는 것이다.
외식 메뉴를 골라보라고 할 때마다, 주야장천 집에서 먹은 한식을 굳이 사 먹으러 가자고 아이들이 말하는 데는 단지 한식이 입에 잘 맞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은 못해도,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이 들려오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포근함, 소속감 같은 것이 있어서겠지. 마치, '한국인인 것' 자체가 칭찬받을 그 무엇인 것 같은 기분이 느껴져서.
텍사스에서 살게 되기 전까지, 나에게는 대학생 때 해 본 40일 남짓의 배낭여행이 최장기간 해외 체류 경험이었다. 그 기간 동안 당연히 한식당은 한 번도 가지 않았고, 한식이 딱히 그립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마 나는 혹시 해외에 나가 살더라도 로컬 푸드 먹으며 잘 살지, 한식당 찾아다닐 타입은 아닌 것 같다'는, 지금 보면 어이없고 가소로운 생각을 했더랬다.
20대 중반과 30대 후반의 입맛의 차이, 소화력의 차이, 내가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는 대학생과 아이들을 챙겨 먹여야 하는 주부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라도 더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이 목적인 '여행'과 여기서 '생활'을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돈을 쓰고 경험을 쌓으러 온 여행길 위에서 스친 한식당과 돈을 벌고 생활을 하러 온 입장에서 마주친 한식당의 차이를. 지금 열 살 남짓 먹은 우리 아이들도 느끼는 '고국의 음식을 파는 가게'의 의미를, 그때, 스물네 살의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여러 가지 요리를 직접 할 수 있다 해도, 한식당이 좀 멀어도, 우리 가족은 가끔 한식당에 간다.
뱃속에는 입에 맞는 다양한 음식을 채우고, 마음속에는 따뜻함과 든든함을 채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