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도, 현지인도 아닌
테이스트 오브 텍사스(Taste of Texas)라는 음식점이 있다.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인데, 메인 메뉴 주문 없이 샐러드 바만 이용할 수도 있고, 스테이크나 버거 같은 메인 메뉴를 주문하고 빵과 샐러드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도 있다. 특히 스테이크는 보관실에 들어가 내가 마음에 드는 고기 조각을 꼭 집어 고를 수도 있다.
스테이크는 부위별, 무게별로 판매해서 "안심 6 온스(1 온스는 약 30g), 립아이 10 온스 주세요." 하는 식으로 주문한다. 나는 보통 6~8 온스면 배가 터질 것 같은데, 38 온스, 그러니까 1kg이 넘는 사이즈의 스테이크도 메뉴에 있다. '테이스트 오브 텍사스'라고 할 만하다.
이름 때문에 이 근처에 출장이나 여행을 온 사람들에게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관광 명소', 맛보다는 특색 있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음식점처럼 보이지만, 사실 현지인들도 많이들 가는 맛집이다. 아무래도 가격대가 있다 보니 결혼기념일, 생일, 졸업 같은 특별한 상황에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의 주인공에게는 디저트를 무료로 준다.
테이블에 앉으면 서버가 "Are you guys from Texas?"라고 묻고 다른 주(州)나 외국에서 온 손님들에게는 중절모를 씌우고 반다나(Bandana)를 두르고 카우보이처럼 사진을 찍어 주고, 반다나는 선물로 준다. 우리 가족도 첫 방문 때 사진을 찍고 반다나를 받아 왔다.
가끔 "어디에서 오셨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보트를 타고 늪지대를 돌아본다든가 자전거로 시내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찍고 다니는 가이드 투어에 참가했을 때, 진행자가 그룹을 모아 놓고
"자 혹시 캘리포니아에서 오신 분? 네, 그렇군요. 다음, 뉴욕에서 오신 분? 아, 네, 애리조나에서 온 분도 있군요!"
하는 식으로 경쾌하게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다른 관광객들이 조금은 조심스럽게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라고 묻는 경우도 있다. 아주 가끔은 BTS의 노래나 한국 드라마를 통해 한국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우리 가족의 대화를 듣고 "한국어를 말하는군요, 한국 사람인가요?"라고 관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테이스트 오브 텍사스' 식당에 처음 간 날은 식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연세 지긋한 백인 남성이 우리 가족 모두가 나오게 자신이 찍어주겠다고 하며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물었었다. 내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으나, 사실 우리의 외모가 아시안인 것만 보고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무례한 일이기는 하다. 부모님 세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이민 온 한 이웃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최대한 차갑게 "Born and raised in New York.(뉴욕에서 나고 자랐는데.)"이라고 대답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전투력'을 갖추지는 못한 데다, 특히 상대방이 나이가 많은 분인 경우는 그냥 웃으며 "South Korea."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낸 지 3년이 넘어가니, 나와 남편은 "Where are you from?"에 대한 대답이 여전히 단순 명쾌하게 한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생각은 조금 복잡해진 모양이었다. 아이들에게 대답을 맡기면
"South Korea에서 왔는데, 지금은 텍사스에 살아요."
"텍사스에서 왔는데, 원래는 한국에서 왔어요."
등으로 대답한다. 하긴 둘째의 기준으로 보면 인생의 삼분의 일, 큰아이의 기준으로는 사분의 일 이상을 텍사스에서 살아온 셈이니. 여기서 겨우 인생의 십 분의 일 쯤을 살고 있는 나나 남편이 느끼는 텍사스와, 아이들이 느낀 텍사스는 전혀 다르겠구나, 싶다.
이곳에 온 첫 해, 우연히 들른 수공예품 가게에서 본, 'God Made, Jesus Saved, Texas Raised'라고 적힌 벽걸이 장식이 갑자기 떠올랐다. 예뻐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 '우리가 텍사스 사람도 아니고, 좀 오버지.' 하는 생각에 못 사 온 것인데,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Texas Raised'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Texas Raised는 말 그대로 텍사스가 '기른'이었지 텍사스에서 '태어난'이 아니었는데, 살 걸 그랬다. 이제와 그 수공예품을 찾을 수도 없을 테고, 역시 마음에 드는 건 그때그때 사야 한다.(음, 어째 결론이 약간 이상한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우리 가족은 '테이스트 오브 텍사스' 식당에 두 번째로 갔을 때도 "Are you guys from Texas?"라는 질문을 들었다. 얼굴을 알아볼 정도의 단골이 아닌 이상 모든 손님에게 으레껏 하는 질문이라면, 기왕이면 "처음 오셨나요?"라고 단순하게 해 주면 좋으련만. "텍사스 사람이신가요?"라는 질문 앞에서 다소 심사숙고하는 심정이 되어버리고 만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주 짧게 고민하다, 이 질문은 우리의 정체성이나 국적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카우보이 사진을 찍어주기 위한 질문이고 우리는 그 사진이 이미 있으므로 "Yes."라고 대답했다.
우리 가족은 텍사스의 관광객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지인이라고 하기도 어색하다. 지금의 우리 가족은 텍사스의 맛을 조금은 아는, 텍사스 생활을 꽤 경험한, 관광객과 현지인의 중간 어디쯤이겠지. ‘테이스트 오브 텍사스’ 음식점 첫 방문자도 아니지만 단골도 아닌 것처럼. 하긴, 텍사스에 앞으로 더 오래 산다고 해도 단골까지 되는 것은 가격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