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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재벌집 막내아들>(2022)

by 안태현

나는 1992년에 태어났다. 내가 처음으로 TV를 본 게 언제였더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 시절 찍혔던 사진 속 나는 늘 TV 근처에서 기어 다녔으며, 걸음마를 뗐다. 드라마 보는 것을 하루 일과 중에 중요한 일 하나로 두고 있었던 어머니를 둔 덕분에 우리 집 TV는 잠에서 깨고 잠에 들 때까지 쉬지 않고 브라운관의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머니 곁에서 나는 ‘TV 유치원’을 보기보다는 아침드라마와 그다음에 이어지는 KBS 2TV ‘TV소설’ 시리즈를 봐오며 자라왔다. 저녁에는 아버지가 보고 있는 TV 뉴스를 봤으며, 또 이후에는 어머니가 보는 미니시리즈들을 보면서 커왔다. 이게 내 유년기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똑같았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난 늘 TV에 틀어져 있는 드라마를 봤다. ‘뭔가를 본다’라는 목적성을 가지고 드라마를 시청한 건 아니었다. ‘뭔가가 틀어져 있다’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냥 드라마는 내가 지나가다 보고, 혹은 앉아있으면 항상 앞에서 틀어져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억지로 드라마는 보지 않았다. 그냥 내 삶 주변이 드라마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도 과거 드라마들의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래서다.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면 드라마가 집 어딘가에서 방영되고 있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나 한 번 본 장면들은 잘 잊어버리지 않는 특이한 능력 덕분에 드라마는 내 인식 체계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꽤 큰 역할을 했다. 아쉽게도 이 능력은 공부나 시험에서는 잘 발현되지 않았다. 만약 그 능력이 공부에서 반영됐다면 지금쯤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다.


드라마에 대한 에세이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거창함이란 없었다. 그저 드라마를 자주 보기도 했거니와 과거 내가 무슨 드라마들을 재밌게 봤을까를 돌아보는 여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가 컸다. 드라마 추천하는 게 업이라면 업이라서, 그 연장선상으로 추진해도 좋을 듯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거 내가 드라마를 보고 느꼈던 감정이나, 그 당시 드라마를 보고 했던 생각들을 풀어쓰려 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갑자기 내가 살았던 삶의 풍경들이 뚜렷하게 기억되는 걸 느꼈다.


바쁜 삶을 산다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과거는 쉽게 잊고 살았다. 그저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다만 그건 같이 한 추억을 공유한 것이었지 나의 삶 전반을 돌아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드라마들을 다시 떠올리다 보니깐 그 시기에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다. 일기장을 펼치듯 기억의 저편을 보게 된 거다. 그 속에서 어린 나는 열심히 놀고, 공부하고,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어제 본 드라마 얘기를 하고, 앞으로 또 어떤 드라마들이 방영된다고 기대하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내게 드라마는 삶의 거대한 부분이었던 듯하다.


38131c4a-320c-4fc7-8a37-1a87cdca9f14.jpg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잊고 살았던 과거를 떠올리니 나를 스쳐간 인연들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내가 했던 실수들, 내가 잘못 품고 있었던 생각들까지 돌아보게 됐다. 드라마를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다니 참 신기하다 싶었다. 그리고 그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을 때 대한민국 시청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은 드라마가 탄생했다. JTBC <재벌집 막내아들>이었다.


<재벌집 막내아들>은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주연으로 송중기, 이성민을 앞세웠고 이외에도 윤제문, 김남희, 박지현, 신현빈 등 굵직굵직한 연기력의 배우들을 기용했다. 더군다나 주 2회 방송이 암묵적 불문율이었던 드라마 시장에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주 3회 편성안을 들고 나타났다. 처음에는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다. 얼마나 작품이 잘 나왔으면 주 3회 편성으로 시청자 사로잡기에 나서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제대로 먹혔다. 첫 회 시청률 6.1%를 기록했던 ‘재벌집 막내아들’은 방송 3회 만에 10%의 시청률을 돌파했고, 최종회에서는 26.9%의 시청률을 보이면서 대박을 쳤다. OTT로 본방송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이 많이 줄어들었음에도 미니시리즈에서 이런 시청률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기록적이었다.


내용이란 이렇다. 대한민국 재계 1위라고 꼽히는 그룹 순양의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던 비서 윤현우(송중기 분)가 숨겨진 순양의 비자금을 빼돌린다. 순양의 오너들도 모르는 비자금이었기에, 당연히 윤현우가 손에 넣더라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윤현우는 당당하게 해외 은행에 예치된 비자금을 들고 나서다 납치를 당한다. 그리고 절벽에서 순양 그룹의 직원들에 의해 머리에 총을 맞는다. 총을 맞은 후에는 차가운 바닷물에 수장된다. 이대로 삶이 끝나는 것일까. 차가운 바닷속에서 눈을 감은 윤현우. 그런 그가 기적적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런데 눈을 뜬 곳은 병원이 아니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분명 총에 맞았는데 이상하다 싶을 때 더 이상한 일이 펼쳐진다. 바로 차를 운전하는 게 일명 순양 그룹 재벌 일가의 코드명 ‘4-0’, 진윤기(김영재 분)였던 것. 게다가 진윤기는 늙은 모습도 아닌 젊은 모습으로 차를 몰고 있다. 그래서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윤현우는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창에 비친 건 자신이 아니다. 창에 비친 건 장성한 윤현우가 아닌, 어린 꼬마의 얼굴일 뿐이었다.


거짓말처럼 윤현우는 순양의 회장 진양철(이성민 분)의 막내 손자 진도준으로 환생했던 것. 환생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 따지고 보면 윤현우는 과거로 온 거였다. 갑자기 왜 윤현우는 진양철의 막내손자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이 궁금증을 가지고 있던 때, 진도준이 된 윤현우는 이걸 두 번째 기회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윤현우는 미래에 벌어질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알고 있었다. 더불어서 진양철의 자서전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었기에, 진양철과 앞으로 순양 그룹에 벌어질 일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인생을 바꿔볼 때다. 미래를 알고 있는 윤현우는 이왕 진도준이 된 거 순양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자신을 죽인 순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야욕이었다.


style_637f1ca852b36.jpg JTBC <재벌집 막내아들>


미래를 알고 있는 윤현우에게 진도준의 삶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미 예견된 사건들을 내다보고 투자를 하고, 재산을 불려 나간다. 재산을 불려 나가면서는 진도준의 아버지인 진윤기를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진양철의 마음까지 돌려세우려 한다. 진양철은 자신처럼 진취적인 생각과 앞으로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진도준에게 이끌린다. 그래서 진윤기를 다시 순양으로 불러들이고, 진도준에게 가업을 물려줄 결심까지 하게 됐다.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순간에서 늘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진양철의 마음을 얻으면서 생기는 가족들의 불화와 나머지 가족들에게 받는 질투의 시선들이었다.


진도준이 된 윤현우는 자신 앞에 놓인 나머지 순양 가족들의 질투와 시기에 맞서서 끊임없이 ‘순양을 가지겠다’는 야욕을 키워간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점점 그는 순양에 대한 복수심보다 점점 자신의 삶을 되찾겠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껴간다. 자신의 진짜 목표는 순양을 손에 넣겠다는 것이 아닌 순양으로 인해 잃었던 자신의 삶을 되찾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윤현우는 순양으로 인해서 피해받았던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구제해야 함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과정에서 윤현우는 자신의 과거까지 돌아봤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늘 원망했던 아버지는 항상 가족들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너무나 일찍 돌아갔던 어머니 역시 자신을 언제나 지지했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또한 힘든 상황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오면서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을 되돌아봤다. 순양 오너 일가의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들, 그러면서 결국 피해를 줬던 것들까지 되돌아보게 됐다. 결국 그는 진도준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윤현우로서 저질러왔던 실수들까지 후회하고 참회했다.


윤현우의 후회와 참회. 그는 그러면서 좌절하기보다 나아가려 했다. 자신의 실수를 되돌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기에 바꿀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윤현우는 아무리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가야지만 바뀌고, 나아가야지만 어쨌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20221121000465_0.jpg JTBC <재벌집 막내아들>


삶을 돌아본다는 건 과거의 삶에 매몰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삶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돌아보고 현재의 상황을 진단할 수 있는 것. 이게 ‘돌아보기’의 중점이었다. 드라마들을 되돌아보면서 나 역시 과거의 나를 돌아봤다. 모든 시간 속에서의 실수, 모든 시간 속에서의 두려움, 모든 시간 속에서의 행복과 불행들을 지켜봤다. 그 시간들을 내가 바꿀 수는 없었지만, 그 과정을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내 삶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드라마였다. 이미 한 편의 드라마가 끝난 뒤, 새로운 드라마를 시청하고, 또 돌아보기 위해 나아가는 나의 모습은 ‘드라마 같은 인생을 꿈꾸는 나’가 아닌 ‘드라마 같은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나’였다. 누군가는 드라마를 많이 보면 허황된 생각을 가지게 되고, 폭력성이 짙어지고, 현실과 멀어진 삶을 산다고 혀를 끌끌 찬다. 하지만 내가 돌아본 드라마들은 그 시대를 담고 있었고, 그 시대를 살았던 나를 담고 있었다.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 드라마 속 시대에는 내가 분명히 자리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같이 통과한 사람들을 우리는 세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세대들이 모여서 만들어가는 것 역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를 담은 것이 드라마라면, 우리는 정말 드라마 같은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재벌집 막내아들> 속 윤현우가 과거 진도준의 삶을 살았듯이, 나 역시 <재벌집 막내아들>과 과거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그 시대를 담은 드라마들을 돌아보면서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반추했다.


반추의 과정은 고단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콤했다. 아니 숭고했다. 결국 깨달은 건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사는 현재의 나니깐.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냐고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확답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내가 돌아본 삶을 통해 내가 느낄 것과 타인이 느낄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느낄 감상에 내 감상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는 싫은 거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은, 내 드라마 같은 인생을 두고 누군가가 자신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데에 큰 힘을 얻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내 드라마도 꽤 나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힘을 얻은 사람의 드라마도 썩 나쁘지는 않을 것만 같다는 기쁨이다.


이제 수많은 드라마들을 돌아봤으니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드라마는 끝나지 않는다. 내 드라마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대하사극처럼 진중하면서 거대한 규모가 될지, 미니시리즈처럼 강렬한 삶이 될지, 일일드라마처럼 평범한 일상 같은 드라마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그 속에서 나의 평범함도 충분히 빛이 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다. 내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에서는 누가 뭐래도 내가 주연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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