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없는 증명' 제3편

- 배심재판과 직업법관 재판의 차이

by 이정봉 변호사

1. 배심제에서의 기능 - 비전문가를 위한 가이드라인

영미법계 국가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무엇보다도 배심원 설시(jury instruction)의 핵심입니다. 배심원들은 법률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일상에서 소환되어 와서, 처음 보는 증거들을 검토하고, 한 사람의 유무죄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비전문가인 배심원들에게 판단의 기준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느 정도 확신하면 유죄라고 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법관은 배심원들에게 이 기준을 설명하고, 배심원들은 그 기준에 비추어 자신의 확신 수준을 점검합니다.

배심제의 또 다른 특징은 배심원들이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단지 "유죄" 또는 "무죄"라고만 말합니다.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어떤 증거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설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것은 배심의 신성함과 독립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들의 판단 과정을 외부에서 검증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따라서 배심제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사전적(ex ante) 기준으로서의 성격이 강합니다. 판단이 이루어지기 전에 배심원들의 마음에 심어주는 기준인 것입니다. 판단이 이루어진 후에는 그 기준이 제대로 적용되었는지 직접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2. 직업법관제에서의 기능- 판결의 정당화 기준

우리나라처럼 직업법관이 사실인정을 담당하는 대륙법계 시스템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첫째, 법관은 전문가입니다. 수년간의 법학 교육과 사법시험, 사법연수원 과정을 거쳤고, 수많은 사건을 다루면서 증거 평가에 대한 경험을 축적해 왔습니다. 비전문가에게 판단 기준을 제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법관은 이미 증거법의 원리와 경험칙을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차이는 법관이 판결 이유를 상세히 작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특정 증거를 신빙성 있다고 보았는지, 왜 피고인의 항변을 배척했는지, 어떤 논리적 추론 과정을 거쳐 유죄 확신에 이르렀는지를 판결문에 기재해야 합니다.


이 맥락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사후적(ex post) 검증 기준으로서의 성격이 강해집니다. 판결문에 기재된 이유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상급심에서 심사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이 "그 판단은 논리와 경험칙에 합치하여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법관의 심증 형성 과정이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이 논리와 경험칙에 부합하는지 검토됩니다. 배심의 "블랙박스" 같은 판단과 달리, 법관의 판단은 투명하게 드러나고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됩니다.



3. 한국 대법원의 독특한 절충- 두 가지 전통의 융합

흥미로운 점은 우리 대법원이 두 가지 법 전통을 복합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영미법 전통에서는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proof beyond reasonable doubt)"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독일법 전통에서는 "확신에 이를 정도의 고도의 개연성을 가진 증명"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 대법원 판례를 보면 두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대법원은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합리적 의심"은 영미법적 요소이고, "확신"은 독일법적 요소입니다. 이러한 절충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독일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직업법관제, 직권주의적 요소 등),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이라는 영미법적 표현이 명문화되었습니다. 두 전통이 하나의 법 체계 안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능적 차이의 핵심- 누가 심사하는가

두 시스템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배심제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배심원의 양심에 호소하는 기준입니다.(https://brunch.co.kr/@7efd1b0de0604d5/109 1편)배심원 각자가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여 "나는 합리적 의심 없이 확신하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 답은 배심원 개인의 것이며, 외부에서 검증되지 않습니다.

직업법관제에서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은 법관의 추론을 심사하는 기준입니다. 법관이 작성한 판결 이유가 논리와 경험칙에 비추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기에 충분한지를 상급심이 검토합니다. 이것은 객관화된 기준이며, 제도적으로 검증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오류 수정 메커니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배심 평결은 사실상 번복되기 어렵습니다. 배심원들이 이유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에 이르렀는지 여부를 외부에서 판단하기 곤란합니다. 미국에서 배심의 무죄 평결에 대해 검찰이 항소할 수 없는 것도 이와 관련됩니다. 검찰이 디폴트처럼 항소하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무죄 당사자 입장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항소는 큰 고통입니다. 반면, 미국처럼 1심 무죄를 다투지 못한다면 입장을 바꿔 피해자가 있는 사건에서의 피해자는 또 그 원통함을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이 배심이 인정한 사실관계를 항소심에서 다시 다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나라에서는 1심 유죄 판결에 대해 피고인이 항소하면, 항소심이 1심의 사실인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도 "형사재판에서 요구되는 증명의 정도에 관한 법리를 오해"했는지를 심사합니다. 법관의 판단이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5. 국민참여재판: 두 시스템 사이의 실험

2008년 도입된 우리나라의 국민참여재판은 이 두 시스템 사이의 흥미로운 실험입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은 유무죄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지만, 그 의견은 권고적 효력만 가집니다. 최종 판단은 여전히 직업법관이 내립니다. 배심원 의견과 다른 판결을 내릴 경우 법관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 설계는 배심제의 민주적 정당성(시민의 참여)과 직업법관제의 전문성 및 검증 가능성을 결합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배심의 의견이 권고에 불과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배심제인가?"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에 관한 설시를 합니다. 이 순간, 우리 법정에서도 영미법적 맥락에서의 "합리적 의심" 개념이 살아 움직입니다. 비전문가인 배심원들에게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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