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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 Jan 13. 2023

우리가 만날 인연이라면

난임 일기 6

우리가 만날 인연이라면

자궁내막증 때문에 복용했던 비잔정을 끊고, 자연임신 시도를 반년 정도 더 하고 나니 어느덧 여름이 되었다. 

명동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고 나의 문제를 처음 확인했던 때로부터 딱 일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제 슬슬 난임 전문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결정하는 데에 별 다른 고민은 없었다. 

집에서 차로는 10분, 막혀도 15분이면 닿는 가까운 곳에 꽤 큰 병원이 있어서였다. 

서울역 맞은편 서울 스퀘어에 있는 차병원인데, 집과 회사의 딱 중간에 있어서 위치가 썩 괜찮아 보였다. 

회사 다니면서 왔다 갔다 해야 하니 주차가 편하면 좋겠고 시설은 깔끔하면 된다는 나의 조건들도 적당히 충족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일은, 바로 기다리는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을 찾아볼 때도 병원 홈페이지에서 프로필을 보고 그냥 선택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필 환자가 가장 많은 선생님이셨다. 

온라인으로 예약을 걸어놓고 전화해서 첫 방문인데 뭔가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봤을 때도 예약이 많은 선생님이라 대기가 길거라는 상담원의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때까지는 많아도 뭐 얼마나 많겠어,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병원에 첫 방문한 날, 진료실 앞 알록달록한 색깔의 소파에 빽빽이 앉아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본 나와 D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와, 이걸 언제 다 기다리지?’였고, 다른 하나는 ‘아, 난임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였다. 

뭐랄까. 동병상련의 기분이랄까.


담당 의사 선생님과 얼굴을 맞대고 진료실에 머무는 시간은 채 15분을 넘지 않지만 진료 대기실, 검사실, 검사 대기실에 있는 시간만 해도 기본 두 시간은 걸린다. 

나의 경우, 휴직을 시작하기 전 세 차례 병원을 방문했고 그중 이틀은 직장 때문에 토요일 방문을 피할 수 없었다. 

주말에는 당연히 환자가 더 몰려 세 시간 뒤에야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지루한 대기시간을 꾸역꾸역 참으며 초음파와 X-ray 검사, 채혈과 소변 검사 등 전체적으로 검진을 받고 나서 겨우 진료실에 들어가 담당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두 시간은 족히 지난 시점이었다.

선생님은 모니터로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설명을 해주셨다.


검사 결과 자궁내막증과 자궁근종이 보이지만 근종은 사이즈가 작아 지금 우려할 단계는 아니다, 난소 나이는 내 나이보다 조금 젊고 나쁘지 않으나 문제는 내가 가진 질환 때문에 생성되는 난포 개수가 적어서 임신이 어려울 것 같다, 고로 내가 난임이 맞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증상들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 언제 급격하게 더 심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시험관 시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게 되면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하자고 하셨다.


막상 시험관 시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겁이 덜컥 났다. 

겨우 몇 가지 질문을 한 후에 진료실을 나왔다. 

사실 난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질문할 거리도 없었지만. 

집에 돌아온 우리는 유튜브로 난임과 시험관 시술 등에 대해 함께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상이 어마 무시하게 많았다. 


그 순간 나는 또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하나는 ‘와, 이걸 언제 다 보지?’였고(결국 꼭 필요해 보이는 몇 개 영상만 골라 보았다), 다른 하나는 ‘아, 역시 병원에서 본 게 이상한 게 아니었어. 세상엔 난임인 사람들이 정말 많구나’였다.


-


난임 전문 병원에 처음 방문한 날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두 달 동안 일곱 번을 방문했다. 한 주에 한 번 꼴로 갔다는 뜻이다. 

기나긴 기다림에도 익숙해졌다. 

갈 때마다 받아야 할 검사 개수도 많지만 환자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많이 해줘야 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진료실 앞에 왜 그렇게 소파들이 많은지 그리고 그 소파들은 하나같이 꽤 편한지 이해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어느 자리가 내 몸에 제일 편한지, 어느 자리가 허리가 덜 배기는지를 알게 되었다.


또 적응한 일이 있다면 복장인데 병원에 도착하면 거의 항상 초음파부터 보기 때문에 병원 예약이 있으면 아예 갈아입기 편한 투피스 차림으로 나가게 되었다. 

초음파를 하도 자주 보다 보니 굴욕 의자에 올라앉는 일도 익숙해졌다. 

채혈과 소변 검사도 꽤 자주 하는데, 왼쪽 팔에 멍이 빠지지 않아 자연스레 오른쪽 팔을 쓱 내밀게 되었고.


나는 이제 막 1차 시술 준비를 시작한 단계임에도 앞이 막막하다. 

운이 좋으면 1차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운이 나쁘면 n차 시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엄마 지망생들도 난임 기간을 길게 가져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고 있다면 크고 유명한 병원들에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기다림을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즐기는 수밖에. 

병원에서 오랄 때 오고 가랄 때 가는 수밖에.


다행히 회사에서 휴직을 받아서 병원을 오가는 데에는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기다림은 길고 길고 길다. 

왜 대기실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들 귀에 뭔가를 꽂고 폰만 들여다보고 있나 했더니 그들 나름대로 반복되는 지루함을 견디는 방법을 찾은 거였다.


나는 주로 글을 쓴다. 

아예 노트북을 들고 가서 진료실에 접수를 걸어놓고 아래층 카페에서 글을 쓴다. 

글쓰기 모임에서 쓸 글의 초안을 쓰기도 한다. 

시간이 그렇게 잘 갈 수가 없다. 

한 시간쯤 지나서 한 번, 삼십 분 지나서 또 한 번 즈음 순서를 확인하러 오면 대충 내 차례를 맞출 수 있다.


-


사실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건 아이에 대한 기다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마 그 기다림 앞에서는 내가 그동안 겪어온 그 어떤 다른 기다림도 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묘한 마음이 든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린 적이 있었나.


한동안 아이를 낳거나 낳지 않는 것은 내가 선택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릴 때는 난임이나 불임 부부들 얘기를 들으면 남일처럼 생각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도, 어쩌면 아이에게도 선택권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간 만날 것이다. 

우리에게 와줄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긴 기다림의 끝에 서 있더라도 결국 만날 것이다. 

모든 인연이 그렇듯이.


언젠가 결혼식 단상에 설 기회가 생기면 내 딸 혹은 내 아들에게 무조건 이 얘기를 해주고 싶다. 

와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기를,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기다렸다고. 

우리에게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우리와 인연이 된 것을 너도 좋아했으면 좋겠고, 그렇게 말해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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