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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지 Oct 09. 2022

자궁내막증 치료제의 치명적인 부작용

난임 일기 4

내가 3개월 동안 복용해야 했던 비잔정은 호르몬 약이라고 했다. 

월경을 멈추게 해 자궁내막증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이미 생긴 덩어리의 사이즈를 줄어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뭇 희망적인 약. 

복용 결과에 따라 약을 끊고 바로 임신을 할 수 있는지, 수술로 이어질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것 외에 기댈 수 있는 게 딱히 없었다.


자궁내막증이 출산을 경험하지 않은 30대 이상 여성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질병이라고는 하나 막상 나의 일이 되고 나자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단 병원에서 하라는 건 다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아침마다 칼 같이 약을 챙겨 먹었다. 

호르몬 약이라 매일 같은 시간에 먹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다 시간을 놓치더라도 최대한 빨리 먹고 다음날부터 다시 제시간에 맞춰 먹으라고 했다. 

까먹을까 봐 알람까지 맞춰놨다.


매일 약을 챙겨 먹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항상 내 몸의 상태에 대해서 의식해야 한다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약 한 알에 매여 있다고 중증 환자가 된 기분이랄까. 

하긴, 환자는 환자지.


약을 먹기 시작하고 얼마 후 그날이 돌아왔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신기했다. 뚝 그쳐 버린 것이다. 

약이 효과가 있긴 있나 보구나,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철딱서니 없지만 막상 이십 년 넘게 나를 괴롭혔던 월경을 하지 않는 그 몇 달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술이 아니라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 약물 치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문제가 좀 생긴 것이다. 

평생 그렇게 꾸준히 약을 먹을 만큼 어디가 아팠던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약이 몸에 미치는 영향력은 꽤나 셌다.


3개월 차에 접어들 즈음,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늘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고 이유 없이 슬펐다. 

사소한 일에 괜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회사는 회사대로 끔찍했고 인간관계는 인간관계대로 뭔가 잘 안 풀리는 느낌이었다.


매일 퇴근하면 D에게 회사 다니기 싫다고 징징댔다.

남들 앞에서는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했지만 속은 곪아가는 기분이었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건 매일 똑같이 반포대교 위를 지나 출근하다가 내가 지금 여기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상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처음에는 약 때문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다. 

약을 먹어서 술을 못 먹으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뒤늦게 메리지 블루가 온 건가, 아님 역시 코비드 블루인가, 회사 때문인가. 

아니 회사는 늘 이 모양이었는데 왜 하필 지금이지. 

원인을 찾아보려 애썼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이유는 찾지 못했다.


불현듯 비잔정을 복용할 때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며 병원에서 준 종이가 생각났다. 

잘 살펴보니 몇 가지 대표적인 부작용 중 체중 증가와 우울증이라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아, 이건 말이 되지. 

그즈음 나는 체중도 증가했고 우울감도 느꼈다. 

체중이 증가해서 우울해졌던 걸까 우울해서 체중이 증가했던 걸까. 

어쨌든 다 그놈의 비잔정 때문이었다. 비잔정이 너무 미웠다.


그렇게 미운 비잔정 복용이 끝나는 세 달 뒤인 11월 말(다시 보지 말자 비잔정아), 대학 병원을 다시 찾았다. 

수술해야 할 줄 알고 찾아왔던 처음보다는 훨씬 덜 긴장됐다.

한 번 해봤다고 복잡한 접수도 척척, 수납도 척척, 검진실도 척척 잘 찾아다녔다.


세 달 만에 다시 담당 의사 선생님을 뵈니 괜히 반가웠다. 

선생님은 약을 복용하는 동안 생리가 없었냐고 물으셨고 그렇다고 했다. 

그럼 다행히 약이 내 몸에 작용을 한 거라고, 약이 잘 든 거라고 하셨다. 

임신 계획이 있다고 했으니 이제 약 복용을 중단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에 생리 주기가 돌아오면 적극적으로 임신 시도를 하라고 하셨다.


비잔정으로 월경을 멈추게 한 것처럼 임신과 수유를 하는 최대 2년 동안에도 월경이 멈추게 되니 이 질병의 진행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도 임신을 빨리 하라는 뜻이었다. 

계획대로 모든 출산이 끝나고 나면 폐경이 올지라도 받아들이고서 수술을 해서 제거하자고.


1년 후에 다시 검사해봅시다. 그때까지는 열심히 임신 시도를 하세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약을 끊은 후에도 혹시라도 그날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그날은 제 날짜에 돌아왔다. 

기가 막히게 정확했던 주기도 완벽하게 돌아왔다. 

우울증으로 괴로웠으나 그 원인을 깨닫고 나서 자발적으로 정신을 다스렸다면 아주 멋진 결말이겠지만, 아니다. 

복용 기간이 끝나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우울증 증상도 서서히 사라졌다. 

약 때문이라는 게 한결 명확해졌다.


약도 끊었겠다, 맞아야 할 주사들도 다 맞았겠다, 이제는 정말 미루지 말고 임신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소싯적(?)에 그토록 즐기던 술도 끊었다. 

카페인도 끊었다. 매일 아침 회사에 출근하면 탕비실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동료들과 수다 떠는 게 루틴이었는데 커피를 안 마시니 더 이상 탕비실에 갈 이유가 없었다. 

정 커피가 땡기면 디카페인 원두를 사다가 내려 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 다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어쩌다 하루 이틀만 그날이 늦어져도 혹시 이번엔 임신한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설렜다. 

우리가 아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양가 부모님들은 얼굴 볼 때마다 손주 얘기를 하셨다. 

낳기만 하라고, 서로 봐주시겠다고 야단이셨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소식은 쉽게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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