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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Jul 02. 2021

런던에서의 마지막 하루

런던 5

8.

런던 클래식 A투어의 마지막 장소는 내셔널 갤러리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멀리 넬슨 제독의 기념탑이 보인다.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깃발이다.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을 광장의 깃발로 세운 것은 당연하다.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이라는 영광의 시기로 진입하는 시금석이 된 전투가 트라팔가 해전이기 때문이다. 1805년, 영국은 이 해전을 대승하며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다.  


넬슨 제독은 이순신 장군과 자주 비교된다. 트라팔가 해전과 한산도 대첩은 모두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힌다. 또한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신이여!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순신 장군도 비슷하다. 노량해전 중에 전사했고, 죽기 전에 남긴 말로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과 넬슨 제독의 넬슨 터치The Nelson Touch도 유사한 전법으로 알려져 있다. 넬슨 터치는 2열 종대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전법이다. 적의 대형을 무너뜨려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유리한 전법이라는 점에서 학익진과 닮았다. 


광장에서 갤러리로 향한다. 거대한 수탉이 계단 왼쪽 단상에 곧추서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파란 컬러가 강렬하다. 프랑스를 박살 낸 트라팔가 해전을 기념하는 광장에 프랑스를 상징하는 파란 수탉이 존재감 있게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 묘하다. 수탉은 공교롭게도 기념탑의 꼭대기에 걸린 넬슨 제독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 높은 제단 위에 오른 수탉의 높이만 4.7미터에 이른다. 울트라 마린 블루의 특별한 컬러는 주변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들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광장의 모든 시선을 수탉이 빨아들이고 있다. 이 공간은 신진 작가들을 위한 특별 전시 무대라고 한다. 18개월에 한 번씩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교체된다. 내셔널 갤러리라는 오래된 것에 새로움을 부여하는 괜찮은 발상이다. 


Trafalgar Square


내셔널 갤러리는 영국 최초의 국립 미술관이다. 다른 유럽의 국립 미술관들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미술품 컬렉션을 국유화하면서 생겨난 반면, 내셔널 갤러리는 개인이 보유하고 있던 회회 작품을 국가가 사들이면서 탄생했다. 1838년 첫 개장 이후, 4차례의 확장 공사를 거쳤다. 현재 운영 중인 4개의 전시관은 연대순으로 작품을 구분하고 있다. 샌즈버리 관에는 중세부터 초기 르네상스의 작품, 서관은 르네상스 말기까지의 작품, 북관은 17세기 이후 작품,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동관에서는 18세기 이후 현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지식가이드를 따라 연대순으로 감상을 시작한다. 투어는 전시관의 주요 작품 앞에 모여서 설명을 듣고, 자유관람 시간을 갖는 순서로 진행된다. 가이드가 마이크에 뱉은 말은 증폭기에서 가공되고 이와 연결된 이어폰으로 우리가 듣는 방식이다. 처음 루브르에서 이런 방식의 투어를 했을 때는 많이 당황했었다. 다른 관람객들의 감상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한다고 해도 주요 작품 앞에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앉는 모양새가 처음에는 마뜩잖았었다. 그나마 이런 투어 방식에 대해 갤러리 측이 합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약간의 민폐에 대한 미안함을 넘길 수 있었다. 아이들은 프랑스에서처럼 신기할 정도로 가이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맨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이 대견하다. 나의 배낭여행 시절에는 고작 명화 한 두 편을 우표 수집하듯 바쁘게 찍고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전시관마다 좋았던 작품을 하나씩만 꼽자면, 샌즈버리 관에서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작품이다. 정밀하고 세밀한 사실적 표현이 놀랍다. 부부 앞에서 멀뚱히 관람객을 보고 있는 삽살개를 닮은 작은 강아지는 그냥 사진 같다. 부부 뒤에 있는 작은 볼록 거울은 그림의 또 다른 재미다. 부부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거울이 걸린 벽에는 글씨도 적혀 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 마치 낙관처럼 작가 자신을 그림 속에 드러내고 있다. 시대를 앞서 간다는 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빈치나 보티첼리의 작품보다 이 그림이 좋은 이유다.


서관에선 단연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들>이다. 이 작품에 대해 지식가이드는 바로크 회화의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소개한다. 나침반, 천구의 같은 당대의 최신 과학도구들이 놓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있다. 탁자 뒤에는 짙은 녹색의 커튼이 내려져 있고, 커튼 좌측 상단 구석에는 십자가상이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다. 당시는 르네상스와 지동설이라는 세상을 뒤바꾸는 혁명적 사건들이 일어나던 시기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지던 1533년은 영국의 헨리 8세와 앤 볼린이 비밀 결혼식을 올렸던 해다.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분리라는 핵폭탄급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시기였던 것이다. 


<대사들>, Hans Holbein


<대사들>은 그런 시대의 관념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의 발 밑에는 정면에서는 형체를 알기 어려운 해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라는 표현 기법이다. 왜곡된 형상이라는 의미의 이것은 다빈치 작품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크 시기에 이르러 독립된 회화 기법으로 인정받았다. 왜곡된 형상은 감상자의 시선과 위치에 따라 숨어있는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걸으며 작품을 보면 길쭉한 낙서처럼 보이던 왜곡된 형상이 해골로 바뀐다. 그래서 이런 작품은 계단 중간쯤에 두고 비스듬한 각도로 감상해야 제격인 작품이다. 까다로운 취향의 소수를 만족시키는 이런 작품들이 왠지 끌린다. 준서가 뒷짐을 지고 고개를 꺾어서 대작의 아나모르포시스를 감상하던 모습이 재밌었다. 


북관에는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그림들이 많다. 플랑드르 화파는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일부 도시의 경제적 번영을 토대로 발전했다. 근사한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여기서는 루벤스의 <삼손과 데릴라>가 눈에 꽂힌다. 삼손은 데릴라의 품에 파묻혀 잠들어 있다. 데릴라는 젖가슴을 드러낸 채 잠든 삼손을 내려다본다. 블레셋 사람이 잠든 삼손의 머리를 자르고 있고, 사창가 여주인으로 보이는 노파가 촛불을 들고 있다. 방문 밖에는 삼손을 공격하려는 블레셋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방으로 뛰어들 것 같다. 내가 본 가장 관능적이고 가장 서사적인 삼손과 데릴라의 그림이다. 블레셋은 히브리어로 이주자(의 땅), 헬라어로는 외국인이란 뜻이다. 팔레스타인Palestine은 블레셋 또는 블레셋의 땅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지막 동관에는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유명 작품들이 널려 있다. 고흐, 세잔, 모네, 쇠라 등 이름만으로 빛나는 작가들의 작품이 고개만 돌리면 보인다. 영국이 사랑하는 작가, 터너의 작품도 인상적이다. 여기서 나를 매료시킨 작품은 테오 반 리셀베르그라는 벨기에 작가의 <해안 풍경Coastal Scene>이다. 참으로 묘한 작품이다. 리셀베르그는 1886년 파리 여행 중 쇠라를 만난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그는 자신의 사실주의 화풍에 쇠라의 점묘법을 도입한다. 프랑스 Riviera 지방의 해안 풍경을 그린 그의 작품에는 쇠라인 듯 아닌 리셀베르그의 개성이 돋보인다. 멀리서 보면 무채색의 그림인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희고 푸르고 파란 물감들이 무질서하게 찍혀 있다. 멀리서 보다가 다가가고 다시 멀리서 보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지식가이드에게 보내는 박수 소리와 함께 투어가 끝난다. 하루 종일 함께 했던 동반자들과도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다. 갤러리 후문을 지나쳐 어둠이 내린 런던 거리로 나선다. 연말의 차가운 밤공기가 유럽 회화의 향연에 달아오른 두 볼을 식힌다. 그래도 고갈된 체력은 어쩔 수가 없다. Library라는 깃발이 흔들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인터넷도 하고 커피도 한잔 마신다. 다시 건물을 나선다. 


시선이 입구에 걸린 고운 대리석 명판으로 향한다. 1710년부터 1727년까지 아이작 뉴튼ISAAC NEWTON이 여기 살았다는 사실을 멋진 필체로 적어 놓았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평론가이자 시인인 애드슨Addison, 천문학자 할리Halley,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스위프트Swift, 건축가 렌Wren 같은 대단한 사람들이 방문했고, 뉴튼 이후에는 버니 박사Dr. Charles Burney와 딸 프란세스Frances의 집이었고, 존슨Johnson, 레이놀즈Reynolds, 가릭Garrick 등 많은 다른 사람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었다는 내용이다. 프랑스 신교도들인 위그노Huguenots들을 위해 1693년에 처음 지어졌다는 사실도 적혀 있다.  


런던은 이래서 참 매력적인 곳이다. 온갖 은밀한 역사들이 거리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박물관이나 갤러리만큼이나 런던의 거리에는 세계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는 역사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피카디리 서커스 쪽에서 흘러나온 네온사인 덕분에 클래식한 런던의 건축물들이 낮과는 다른 얼굴로 다시 태어나 있다.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에 런던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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