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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준 May 28. 2020

말하기 어려운 주제에 대해

글 12

 믿고 싶지 않지만 믿어야 하는 것과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 또한,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현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들이밀고 패배를 자인하게 한다. 이런 아이러니컬(ironical)한 삶의 수사학을 견뎌내는 일은 항상 쉽지 않다. 모순은 언제나 그러한 상황을 인지하는 시점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후회를 떠넘긴다. 받아들이고 나아갈 것인지, 부정하며 뒤돌아갈 것인지. 사는 것이 이러한 선택의 연속이고, 전자가 주체적 선택의 삶이라면, 후자는 그 반대편 부산물인 후회로 쌓아 올린 삶일지 모르겠다.


 후회로 쌓아 올린 탑이 선택한 삶의 가치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숨 쉬는 것조차 괴롭게 된다. 과거로 도피한 사람들은 이 압박감 속에서 질식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방어기제의 방편일 테다. 그렇게 '재선택'된 삶은 체념의 삶이다. 과거에 둔 무게중심은 점점 발을 잡아끌고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끌고 올라간다. 우리는 무기력하게 절망하고, 희망은 그 무력하게 주저앉은 곳에서야 겨우 보인다. 희망은 아름다워 보이나 희미하고, 답답한 현실은 끔찍하게 완강해 보인다.


 이번에도 벼랑 끝에서 꽃을 찾고 있다. 어떻게든 떨어지지 않으려 그 이유를 온몸으로 찾고 있다. 행위에 대한 당위성이 필요했다. 늘 그런 식으로 찾아왔다. 떨어질 일만 남은 것 같던 벼랑 끝에서 꽃을 찾아 내려오는 일처럼, 생에 가장 절박한 순간마다 꽃이 있었고 한 손에 꼭 쥐어 든 꽃은 비어있는 두 손 중 절반을 채워주는 빈약한 성취감일지라도 돌아 내려갈 용기를 주기엔 충분했기에 돌아 내려 올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지는 것이 겁이 나지만 항상 보지 못한 곳에는 천천히 돌아 내려오는 선택지도 같이 있었기에 자그마한 계기만 있다면 끌고 올라갔던 짐들은 절벽 밖으로 던져버리고 어둑어둑한 밤을 지나 천천히 아침까지 되돌아왔다.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대로 올라온 이곳에서, 이번에도 꽃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벼랑 끝에 서 있다. 꽃을 찾고 있다. 내려갈 이유가 필요했다.


 마음이 무너지는 일은 잦은 일이기에, 어느 순간부터 희망에 대해 말할 때면 그 존재의 여부보다는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고집스럽게 늘어놓는다. 설명이나 설득이 아닌, 오히려 체념적 호소이다. 그저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외침이다. 희망의 빈곤을 느낄 때마다 서럽다. 부르짖는 미학적 파탄의 희망도, 낮게 읊조리는 타협의 희망도, 그렇게라도, 쉽게 희망에 대해 말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늘어놓겠다. 지금은 희망에 대한 인플레이션이 필요하다.





정작 나는 희망에 대해 말하며 희망을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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