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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y 05. 2023

눈 뜨자마자 행-복

상담 종료. 자기 작업은 진행 중.

 이상하리 만치 어제부터 기분이 좋다. 특히 오늘 아침엔 눈을 슬며시 뜨기도 전부터 행복감이 밀려왔다. 환희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곧 잘 기분이 좋았다가 또 기분이 나쁘기도 하지만, 최근엔 조금 다른 차원의 행복감을 느낀다.


"앗싸. 아침 먹어야지."


 이런 생각을 눈 뜨자마자 하다니. 난 아침밥 먹을 생각에 기뻤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 것은 음식에 대한 집착일까. 재단하고 평가하기보다는 눈 뜨자마자 밥을 먹고, 또 점심에 먹을 것들을 챙겨갈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든 나를 기특하게 여겨주기로 한다. 무엇보다 휴일에 조금 부지런을 떨어 마르쉐에서 장을 봐 오고, 야채와 과일을 모두 다듬어 넣어두고, 몇 가지 요리는 완성된 버전으로 챙겨두었다는 점이, 그래서 내가 먹고 싶은 대로 건강하고 맛있는 채식 밥상을 언제든 쉽게 차려먹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뻤다.


 5월 1일 휴일에 마르쉐가 집 근처에서 열렸다. 갑자기 동네 친구들을 불러 잠깐 얼굴을 보고 땡볕을 쬐며 근황토크를 하고 헤어졌다. 아스파라거스는 유리병에 담아 물에 담가두고, 처음 본 다래순은 데쳐서 반은 냉동, 반은 냉장고에 넣어뒀다. 토마토는 꼭지를 따서 예쁘게 담아 찬장에 올려두고, 루꼴라 잎은 샐러드 스피너에 돌려 물기를 완전히 뺀 다음 면보에 담아 밀폐용기에 담아뒀다. 비트는 오븐에 구워 썰어서 밀폐용기에 담고, 당근 두 개는 채칼로 썰어 딜을 넣고 라페를 만들어두고, 나머지 두 개는 쪄서 냉장고에 넣었다. 완두콩은 깍지 채 삶아 식힌 뒤 콩알만 유리병에 담아 딤채에 넣었다. 병아리콩은 불려 삶아 냉동했다. 한 달은 먹고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살아있는 것을 먹는 다는 감각이 좋다. 잘 키운 것들을 사서 낑낑거리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즐거워.


 아침에 비트와 사과, 찐 당근과 레몬즙을 갈아 마시고 도시락통에 준비해 둔 것들 중 그날그날 당기는 것들을 담기만 하면 도시락이 완성된다. 아침을 먹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설거지까지 마치면 한 시간이 지난다. 일찍 일어나 아침에 이런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난 뿌듯함으로 하루를 보낸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그냥 조립하면 끝나는 도시락. 엄청 든든하다.

 지난주에 거의 1년 가까이 받았던 상담을 종료했다. 냉소적이고 의심이 가득한 채로 시작한 상담의 종료는 나의 자유로움을 알아차리며 끝났다.

 "어떤 기분이에요? 어때요?"

 상담 때마다 수도 없이 물어보시는 이 질문에 나는 대답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떻게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벼워요."

 마지막 상담에서 나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가볍군요. 가볍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자유로워요."


 자유의 감각으로 매일을 보내니 아침에 눈을 뜨면 기쁨이 몰려오는구나. 매주, 그러다 격주에 한 시간씩 꼬박 시간을 내고, 또 이 비용을 기꺼이 부담하고, 매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고, 강의를 듣고, 또 그 비용을 부담하는 일. 생각보다 보통일은 아니다. 비용 부담의 산을 넘으면 시간의 부담이 있고, 시간을 기꺼이 내는 데에 익숙해지면 매일 놓치지 않고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큰 산이 있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 내면과 마주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기에 이 저항에 항복하고 회피하기도 쉽고, 과정 중에 삐딱선을 타버리기도 쉽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 거짓말로 속이지 않고 용기를 냈던 그 모든 순간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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