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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Aug 16. 2021

'건강한 몸'에 대하여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수술 후 회복과정을 거치며 주변인들과 제일 많이 주고받은 말은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내가 퇴사를 하며 동료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에도 '건강하세요'라는 말이 이때만큼 와닿은 적이 없었다며,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빌기도 했다. 엄마는 매번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보냈고, 비슷한 메시지들이 주변인들로부터 전해졌다. 올해 나에게 이 메시지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이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나 '건강하라'는 메시지는 시공간을 넘어서 무난한 인사말 정도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 판데믹을 겪으며, 이 메시지는 조금 더 진정성 있는 안부 인사의 의미가 아닐까. 메시지를 주는 이도, 받는 이도 그저 좋은 의도로, 상대가 진짜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나도, 듣는 나도 그랬으니까.


조한진희님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깨달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저>를 읽으며 '건강한' 성인 기준의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편파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됐는데, 그사이 나는 또 학습의 효과가 바래버린 채로 지내왔나보다. 조한진희님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는 사회가 질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정상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편견과 혐오의 범주에 있을 수밖에 없는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저자가 앓았던 병 중에 자궁근종도 있었고, 내가 진단과 치료, 회복과정에서 분노했던 부분들에 대해 정제된 언어로 쓴 글들도 있어 무척이나 공감하며 읽어 내려갔다.


무엇이 건강한 것일까? 질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 사람 중 질병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대의학은 날로 발전해 많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경험하고 있는 '원인 모를 만성 통증'처럼 원인을 알지 못한 병으로 고통받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진단명이 있는 병을 가지고 살지만 한 번도 진단받지 않아 내가 '건강하다'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질병은 의학적으로 '질병코드'가 있느냐에 따라 정의된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니코틴 중독 질환'으로, 게임중독도 정신과 질환의 질병코드를 가진 질병으로 분류된다. 2019년부터 체질량지수(BMI) 35kg/m2 이상이거나 30kg/m2 이상이면서 동반질환(고혈압·당뇨병 등)을 갖고 있는 경우 '병적 비만'으로 질병이 인정된다. 한편, 질병코드가 없는 극희귀질환 환자들은 의료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이중고, 삼중고를 겪기도 한다.


'건강한 '이라는 정의가 언제부턴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치중된  같다. 탄력 있는 몸매를 가지면 건강한 사람대접을 받는다. 대중매체에서 이런 현상은 극대화된다. 우리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가수 김종국이 단백질 과다 섭취로 인한 통풍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지만, 그는 여전히 '건강미' 갖춘 근육질 남성으로 소비된다.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센터만 가도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만 봐도 그렇다. 살을 빼고 근육량을 키워 '건강한' 몸을 만들겠다면서 '탄단지' 비율을 맞춰 식단 관리를 하는데,  중심에는 성장촉진제를 맞춰 키운 닭의 가슴살이 있다. 이런 건강하지 않은 다이어트 식단을 오래 하다 보면 변비가 오고, 피부에 트러블이 생기고, 생리불순이 오기도 한다. 마르지 않은 몸을 가지는 것은 '자기 관리' 부족한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마른 몸을 가지기 위해 냉동 닭가슴살을 데워   식사를 하는 사람은 '자기 관리' 철저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엉덩이가  달라 붙어있는 사람이, 가슴에 볼륨감은 있지만 허리는 잘록한 사람이 자기관리를   사람으로 인정된다. '다이어트' '멋진 몸매' '근육량' '웰빙'으로 단어만 바뀐 채로 계속 '탄력 있는 ' 만들어야만 한다는 압박에 우리를 밀어 넣는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질병은 몸이 보내는 신호라는 구절이 와닿았다. 몸이 나를 죽이지 않은 상태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 그러니 다른 것들을 좀 내려놓고 몸을 먼저 돌보라는 그 신호를 우리는 너무 쉽게 무시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쁘다는 이유로, 살을 빼야 한다는 이유로 몸의 신호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쉽다. 내가 무시하지 않더라도 '현생'이 그 신호를 무시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 때로는 우리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질병'이기 때문에 부정적인 것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없애버려야 할 것으로만 생각한다. 질 높은 휴식과 깊숙이 나를 돌보는 일들은 종종 헬스장 스케줄에 밀려버린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건강'이란 개념은 '허상'이 되어가는 듯도 하다.


몸을 생각해 채식을 늘려가는 나를 보며 그 자체가 본인의 육식 중심 식단을 비난하는 일로 받아들이거나 '그렇게 한다고 건강해지냐' 혹은 '식물은 안 불쌍하냐'는 조롱으로 받아치는 사람들이 있다. 조롱의 끝엔 종종 '살은 얼마나 빠져?'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지금의 대화가 조금 폭력적으로 느껴진다'라고 직설적으로 선을 긋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하하하'하고 '쿨하게' 넘겨야만 했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삶은 매번 설명을 요구받지만, 결혼하는 삶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정상화'된 육식을 하는 사람이 아닌 '비정상화'된 채식 지향자에게는 설명이 요구된다. 내가 채식 지향을 10년쯤 했으면 몰라, 다시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위에서 언급한 조롱들은 별 타격이 없는데, '의사가 고기 먹으라더라'라는 말에는 나도 모르게 자꾸 반박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나의 채식 지향에 브레이크를 잘 거는 주변인 중 한 명은 그의 지인이 평생 채식 지향을 하다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의사로부터  '고기를 먹어 체력을 보충하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얘기를 반복적으로한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그렇지만, 전 세계적으로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의 말은 종종 무조건적인 권위를 가진다. 코넬대학교 수업 과정에서도 암환자의 식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보통 암환자들은 입맛이 없어 식사량을 대폭 줄이게 되는데, 이것이 면역력 저하로 이어져 항암이나 회복 과정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의사들은 종종 환자에게 육식을 포함한 식사를 잘 하기를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기와 가공육은 그 자체만으로도 발암물질로 분류되어있기 때문에, 장기 복용을 지양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즉, 당장의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보다 해로운 것이라도 우선 먹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미국 내 의대 중 20%는 단 한 시간의 영양 수업을 듣지 않고도 졸업이 가능하며, 전체 의대의 경우 4년간 영양 수업을 25시간 이하로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에게 영양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암환자나 당뇨병 환자 등 특정 환자군에게는 병원 내 영양사의 협진으로 영양교육을 하고 있지만, 수가 문제로 아직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다행인 것은 수년 전부터 하버드, 스탠퍼드를 포함한 많은 미국 내 의대에서 이 문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의사들이 임상현장에서 음식과 영양에 대해 환자들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하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하버드 의대의 프로그램은 의대 내 '생활치료(life style medicine)'분과를 별도로 두고,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를 졸업한 라니 폴락(Rani Polak) 의학 박사가 이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영양치료 전문 의사를 발굴해 양성하겠다는 목표로 '영양 의학회'가 발족했다. 현실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질병 예방에 있어 영양을 빼놓을 수 없다는 자각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떻게 운영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의사들이 영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불완전한 정보의 거름망 없는 습득을 지양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100명의 사람에게 100개의 '건강'에 대한 정의와 기준이 있다. 태어난 몸에 따라, 자라온 환경에 따라, 경험한 질병 히스토리에 따라 각자가 내리는 건강의 정의는 다를 것이다. 나에게 건강한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 나는 앞으로 언젠가 또 '건강하지 않은 나'를 마주했을 때 어떤 태도로 스스로를 대할 수 있을까? 배에 난 수술 상처를 마주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응급 수술 과정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이 상기되었기 때문일까? 평생 내가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겉으로도 드러나게 된 것이 속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에게 '건강한 몸'의 정의가 무엇일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결과론적인 어떤 상태이기보다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내가 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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