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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이d Feb 15. 2022

꿈에서 만나도 별로 할 말은 없지만

아침마다 신들과 영웅들과 시간을 먹는다

엄마는 나를 낳기 전 열개의 태몽을 꾸었다고 말했었다. 그것도 혼자서만. 누구에게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열흘내 하루 하나씩 내 꿈만 꾸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게 무슨 꿈들이었는지 모른다. 말해주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으니까. 왜 그것들을 나와 연결지어 말하느냐고 맞서기만 했다.


여름철 우리집 앞에 한 우체부가 앉아 있었다. 우편물을 손에 들고 기다리는 그 자세는 꼿꼿했다. 배달할 게 쌓여있을텐데 업무의 짐에서 가벼운 모습의 그는 나를 한번에 알아보고 먼저 걸어와 내 이름 세글자와 함께 손에 든 봉투를 주었고 영화속 히어로처럼 눈 앞에서 사라졌다.


빈집. 땀에 젖은 손. 구겨진 봉투. 오후의 현기증.

엄마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겨둔 것이라고는 개켜둔 옷들과 물기 마른 그릇들,

하얀 바닥.

살림의 끝, 청소의 경지.

당신의 이야기에 내가 먼저 귀를 닫아걸고 난 후 일어난

처음이자 최후의 선전포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의 장기 기능은 멈추고 뇌와 심장만 뛰는 상태에서 우리는 외부에서 관을 연결해 영양 상태를 유지했지만 면역과 체력 기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하됐다. 망가지기의 하향곡선. 엄마는 이 집-몸의 내장이자 척추였다. 그렇지만 영점까지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중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아'. 그 말은 틀렸다. '엄마는 떠났어'. 그 말보다는...... '엄마는 죽었어'. 그 말이 정확했다. 나는 교회를 그렇게 다니면서도 부활의 신앙고백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우리, 껍데기, 남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희망과 믿음으로 버성기며 살았다. 엄마가 있던 자리들은 그 후에도 남겨진 채로 보존되고, 차차 터부시됐다. 


한 마리의 여우가 자기 꼬리를 먹어 꼬리 둘 달린 여우를 똥구멍으로 낳고 두 번째 여우는 똑같이 해서 꼬리 셋 달린 여우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열 번째 여우까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아홉번의 먹고 싸기의 연속. 그러다가 이가 부러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여우들을 바라보았다. 먹으면서 즐겁다기보다 자기 몸을 씹으며 겪는 통증이 더 클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여우들의 표정을 봤다. 엄마가 자주 그런 얼굴로 벽을 보고 앉아 있었지.


새벽 4시. 어두움이 무겁기까지 한 시간에 뜬눈으로 이불을 붙잡고 누워있었다. 여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눈빛과 털의 감촉을 떠올렸다. 꼬리의 움직임과 그것들이 소화되는 움직임을 그려보였다. 열 마리의, 열 개의, 엄마의, 태몽을, 나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꿈들을 상상했다. 내 불알을, 내 두통을, 내 피부병과 어린 시절의 가족 캠핑을. 엄마는 그날 우체부의 오토바이 짐칸에 숨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허황되지만 순간, 확신했다.


엄마는 바로 잠들지 못하는 건 이불 때문이라고 했다. 이불에는 매일 새로 들러붙는 상상 세계-엄마는 영혼의 세계라고 하긴 했다-의 먼지들이 있어서 내가 숨을 쉬는 한 다른 세계의 먼지를 마시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럴땐 이불 안감의 보드라운 면을 쓰다듬으면 잠에 쉬이 들 수 있다고 하고 그녀는 방을 떠나 자기 분의 먼지를 마시러 개인적 침실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가 없어진 날 받은 봉투를 뜯기 위해 이불장을 열고 얼굴과 손을 그 속에 파묻었다. 나의 이름만 봉투 겉면에 있던 그 비밀의 종이를 육중한 이불틈에 찔러 넣고 갈가리 찢었다. 중력보다 더한 압박을 단전의 힘으로 밀어낸 상태로 버티며 익명의 편지를 저 세계의 먼지로 바꾸었다. 내 꿈으로 열흘이고 백 일이고 수 시간에 걸쳐 돌려받기 위해.


분진들을 거부할 수 없어 마음 한구석이 늘 희뿌옇다.


ㅡ 치과에서 나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잘 맞는다. 그걸 믿고 우산을 미리 챙긴 바다. 건물 입구에서 모르는 여성은 비가 그치거나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통화중이었다. 

 기상청 직원들이 야유회 가는 날엔 비가 온다는 우스갯소리도 철지난 농담이 된 것 같다. 어쩌다 그리 자주 틀리다가 이제는 믿을만한 것이 되었는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고 의미있는 변화가 있길래 그런건지는 모르겠다. 항상 농이나 비아냥은 쉽고 간단하지만 차분히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은 노동이기 때문에 대가가 환산되지 않거나 그 계산이 까다롭다 생각이 들면 아예 버려둔 창고가 된다. 

 입춘도 지났고, 날도 따뜻해지고, 올해 첫 비가 내리니 이제는 몸과 시간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봄이다!"를 외칠것 같았는데 비 그치고 공기가 매섭다. 눈도 내리고 이번 한 주 한파란다. 나는 늘 충분히 알지 못하거나 간단히 판단 내렸다가 낭패를 겪는다. 

 신화와 꿈은 노란색 신호등이다. 준비와 지체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깜박히며 섣부름을 중화시켜준다. 엄마라든가 가문 내 익명의 누군가가 나에 대한 최초의 꿈을 꾸던 그 시절에 나도 어떤 꿈을 꾸었을까? 경험한 것 없이도 꿈이라 할 만한 것을 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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