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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한 식물 누나 Dec 28. 2023

방구석 시든 식물에게...


식물은 많고 식집사는 나 하나 


뒤늦게 겨울 채비를 하려고 구석구석 살펴보니 식집사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한 시들시들한 식물들이 보인다. 지난여름 병충해에 호되게 당한 홍콩야자부터 잎이 몇 장 남지 않은 필레아페페, 일찍 찾아온 추위에 잎이 노랗게 질려버린 휘카스 움베르타까지...  


식물은 많고 식집사는 나 하나라는 핑계가 있지만, 올해도 많은 식물들을 시들게 만들었다. 수많은 식물을 관리하다 보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소외된 식물도 있고, 내 공간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또 다른 소유의 욕망, 가드닝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테라스에 식물을 내어두면 나 대신 자연이 식물을 키워준다. 자연의 회복력은 가드너의 손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보다 자연이 식물을 훨씬 더 잘 키우는 걸 보면, 결국 가드닝이라는 건 식물을 소유하고 내게 길들이려는 욕심의 한 조각이구나 싶다.  


하지만 겨울은 열대지방이 고향인 대부분의 실내 식물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자연이 거두어주리라는 기대는 고이 접어두고, 실내 구석구석으로 식물을 옮겨야 한다. 겨울은 K-식집사에게 고된 노동의 계절이다.  


고백건대, 예전에는 식물이 내가 원하는 상태로 예쁘게 자라지 않으면 쉽게 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든 걸까? 시든 식물도 쉽게 내다 버리지 못하고 굳이 옆에 두려고 한다.




식물의 순간들이 쌓이면....


꼭 죽은 것만 같았던 구근에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던 아마릴리스를 기억한다. 잡초처럼 무성해지기만 하다 겨울에 잎을 우수수 떨군 채 텅 빈 가지로 부들부들 떨던 애니시다가 풍성한 노란 꽃으로 가장 먼저 봄을 알려주었던 지난봄도 기억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뱅갈고무나무를 짧게 가지치기해 두었더니 여름내 새로운 잎으로 재탄생했던 순간도 있다.




누구나 꺾이고 시들 때가 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식집사는 지금 예쁘지 않은 식물에도 관대해진다. 너도 쉬고 싶겠지... 가만히 말을 건네본다. 사람에게도 쉬어가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나를 둘러싼 환경이 척박하면 사람의 마음도 쉽게 꺾이고 시드는 법이니까.  


나의 채도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의 빛이 너무 강렬하고 화사해도 마음 한구석 음울한 기운이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쉽게 움츠러든다. 그늘에서 잘 자라는 식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굳이 분류하려면 음지식물이랄까? 음지식물에게 강한 직사광선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럴 때 나는 음지식물처럼 움츠려든다.




응원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어떤 사람은 식물이 시들 거리면 자꾸 물을 주려고 한다. 하지만 물에 잠겨 뿌리가 썩어가는 일이 식물에게는 가장 위험한 법이다. 물을 빨아들일 힘조차 없으면 흙이 먼지 날 것처럼 바싹 말라도 좋으니 그늘에서 쉬어간다. 물도 빛도 과하게 주지 말고 그냥 쉬게 내버려 둬야 한다. 식물이 원래 가진 힘을 가만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 집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시들 거려도 살아만 있다면...


힘이 들 때 힘내라는 말처럼 경솔하고 가혹한 건 없으니, 힘들 땐 그냥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너무 힘이 들 때, 내가 속한 세상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 잎을 모두 떨구고 가만히 쉬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살아만 있겠다는 마음으로 견뎌보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에너지를 아끼고 충분히 쉬어보자.


언젠가 내 창가에 따뜻한 빛이 들고 목마른 가지를 다정한 비로 적셔줄 봄이 찾아올 것이다. 겨울을 맞아 한껏 움츠리고 시들 거리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식물은 지치고 힘들어도 숨 쉬는 법을 알려주는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만 있어도 되는구나... 요즘은 그래서 SNS 속 화려한 열대 식물보다 내 방 한구석의 시들거리는 식물들을 더욱 사랑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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