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유한 식물 누나 Dec 29. 2023

꽃의 큰 그림에 비하면...


꽃부터 얼른 피워! 


아직 봄을 이야기하긴 이르지만 이른 봄 나무들은 생명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잎을 내기도 전에 꽃부터 불쑥 피기 시작한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 산수유와 매화나무가 그렇고 목련과 벚나무가 그렇다. 한국의 특산 식물 개나리도 마찬가지다.   


충매화의 경우엔 곤충이 꽃을 쉽게 찾도록 하고, 풍매화의 경우엔 잎이 바람에 의한 꽃가루 이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꽃부터 얼른 피우는 것이라고 한다.  



꽃으로 그리는 큰 그림 


지금의 나는 영원할 수 없지만 미래에 자신의 종이 계속 번영하고 무한한 삶을 펼치기를 꿈꾸는 나무들... 나무는 하루하루 내 생명을 이어가는데 연연하기보다 꽃을 통해 먼 미래의 그림을 그린다.  

 

꼭 씨앗을 맺어 번식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꺾꽂이나 접붙이기 등으로 손쉽게 번식한 식물은 자기가 타고난 형질과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결국은 생명력을 위협받고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꽃과 씨앗을 통해 번식한 식물은 계속해서 새로운 활기와 생명력을 얻게 된다. 




우리 눈에 예쁘지 않아도...


실내에서 자연의 한 조각인 식물을 키우는 우리들도 꽃을 기다린다. 꽃이 피지 않는 것 같은 식물도 사실 꽃이 핀다. 사람의 눈에 예뻐야 꼭 꽃인 것은 아니다. 어떤 식물은 인간이나 곤충의 관심을 끄는 장식물을 일체 생략한 채 꼭 필요한 요소만 갖추고 있다.   


그런데 가끔 관엽식물을 키우다 보면 얘는 왜 이렇게 예쁘지도 않은 꽃을 열심히 피울까 싶을 때가 있다. 청페페의 꽃은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을 때가 있는데 그냥 긴 막대기 모양이 전부다. 사람들은 꽃이 예쁘기는커녕 징그럽다고 잘라버리기도 한다.  



어차피 내 집에선 종자 번식도 제대로 못할 텐데 무지하게 꽃을 피워대는 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꽃이 꼭 인간의 눈에 아름다워야 하는 법은 없다. '너 좋으라고 피는 거 아니야!' 하는 꽃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다.   




온통 꽃이 피어라 


헤르만 헤세의 시를 좋아한다.
<온통 꽃이 피어라>라는 시를 잠깐 소개한다.  


복숭아나무 온통 꽃이 피어 서 있네.
모든 꽃이 열매가 되진 않아. 
(중략)  
생각들도 꽃들처럼 피어나지.
매일 백가지나.
피어나게 둬! 모든 것이 제 길을 가게 해.
열매에 대해선 묻지 말고!  
그건 놀이이자 무죄함이니
남아돌게 피어나야지.
안 그랬다간 세상이 너무 좁을 테니.
삶이 아무 낙도 없을 테니.  


- 출처 : 헤르만헤세의 나무들  




그렇다. 꽃을 피우는 식물들에게 열매에 대해서는 묻지 말자. 놀이처럼 남아돌게 피게 하자. 안 그랬다간 삶의 아무 낙도 없을 테니 말이다. 꼭 열매를 맺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껏 피어나게 두라는 헤세의 문장이 내 마음을 톡톡 두드린다.  


가끔 낭비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 인생의 에센스와는 거리가 먼... 어쩌면 겉치레 같은 것들... 하지만 삶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쓸데없고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데 있다.




무상하고 아름다운 것 vs 지속적이고 지루한 것


헤르만 헤세는 "꽃들이 무상하고 아름답다면 황금은 지속적이고 지루하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황금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황금을 얻기 위해 보내는 시간은 너무도 지루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우리는 황금을 얻기 위해 보내는 지루한 시간을 견딘다. 꽃들은 씨앗을 맺어 영원을 꿈꾸지만 변하지 않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과 미래의 번영... 꽃의 큰 그림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작은 낙서만 줄곧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이전 16화 식물이 가르쳐 준 3가지 삶의 법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