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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한 식물 누나 Dec 11. 2023

오늘도 초록에 기대어...


조금씩 멀어지는 중입니다


나는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안면인식장애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람들 얼굴에 거의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친구와 직장 동료의 이목구비를 제대로 떠올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같이 길을 걷던 지인이 '아까 그 모자 쓴 사람 봤어? 진짜 웃기더라.' 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넘기지만 난 그 사람을 마주친 기억이 전혀 없다. 



예전에는 내가 이런 성향이 있다는 걸 잘 몰랐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차분히 생각해 보니 사람을 회피하려는 성향에서 이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다.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마음... 나는 확실히 차츰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이들이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에게 더 빠져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반려식물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가 보다. 나는 늘 사람보다 식물에게 관심이 있고 매력을 느낀다. 




산책길의 작은 풍경들


산책을 할 땐 사람 대신 풍경에 집중하며 늘 풀과 나무를 바라본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이다. 식물은 계절마다 변해가는 모습들이 참 재미있다. 요즘엔 시린 겨울하늘에 그려진 팽나무 가지의 선들이 흥미롭고, 텅 빈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산수유 열매가 아주 귀엽게 반짝인다. 



산책을 할 때 마주 오는 다른 사람을 의식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말을 걸면 친절하게 대답도 하고, 상점에선 인사도 잘 건네는 편이지만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 듯하다. 따라서 그 사람이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 본 풀과 나무들은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난다. 



누구나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람이라지만 내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딱히, 대단한 실연이나 배반을 겪은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작은 일에도 민감한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난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가꾸셨는데,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약간 시릴뿐이다. 초록을 가까이하며 그렇게 하루를 견디셨구나 싶다. 



초록이 전하는 위안


식물은 나에게 오늘을 살아갈 초록 에너지를 나누어준다. 힘들 때 억지로 힘내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 가끔 작디작은 초록잎을 마법처럼 펼쳐 보이는 것이 큰 기쁨이자 위안이 된다. 어쩌다 꽁꽁 숨겨두었던 꽃이라도 한송이 피어난다면 마음이 설레어 그날 하루는 어쩔 줄을 모른다. 



식물을 키우면 나도 뭔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하는 자기 효능감이 조금은 생긴다. 식물 이야기를 할 때면 누구보다 말이 많아지고, 글에 담을 내용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나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식물을 좋아하는지를 느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풍요롭지는 않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식물과 함께라면 내 모습 그대로 지낼 수 있어서 좋다. 억지로 사람들에게 맞춰주거나 마음에 없는 말들을 건넬 필요가 없다. 식물과 함께하는 내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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