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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 Mar 14. 2022

할머니가 되고 싶어

몰래 적는 사랑고백 3

*우울, 자살 사고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려요.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은지 5년째다. 우울은 사람마다 다른 경험으로 나타나는데, 나는 증상이 심해질 때면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자지 않는 시간에는 끊임없이 먹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아래에 자살 사고가 있다. 

 중학생 때쯤엔 여기가 아닌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었다. 어디에서도 집처럼 편안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땐 살아있는 게 죄스러웠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거의 매일 매시간 죽음에 대해 생각했으나 실행하기 무서웠다. 아프고 괴로울 것도 무서웠으나,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 가장 두려웠다. 모태신앙으로 시작해 신실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기독교식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그 안에서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은 진리에 가까웠다(교회를 떠난지 오래 되어 요즘은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으나 자살을 만류하는 것은 똑같을 것이다). 겁이 잔뜩 묻은 아주 사소한 자해와 단 한번의 소심한 자살시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나마도 너무 작고 하찮아서 생명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15층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점에서 언제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나는 가능하다면 네 곁에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앨런의 직장은 휴가를 쓰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다. 내 기분이 많이 가라앉아있을 때-며칠동안 출근을 하지 못하고 침대에만 있거나 죽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말할 때- 앨런은 어김없이 이렇게 묻는다. 


 "오늘 연차 쓸까?"


 그의 존재는 내 우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므로 그의 연차는 효용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곁에 있으면 내가 조금이나마 괜찮아질 거라 믿는 그 자신감이 사랑스럽고, 이를 위해 소중한 휴가를 반납하는 마음 씀이 사랑스럽다. 

 위의 질문에 대한 내 대부분의 대답은 "아니." 지만, 내 대답 여부와 상관 없이 그는 마음대로 연차를 쓸 때가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볼거리가 많은 이케아 같은 곳에 데려가기도 하고, 평소보다 더 자주 끌어안기도 한다. 

 여전히 내게 마흔 이후의 삶은 요원하다. 그래서 네가 오래도록 내 발목을 붙잡았으면 한다. 내가 여기를 훌쩍 떠나 삶 너머로 한걸음 내딛으려고 할 때 네게 잡힌 발목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붙잡힌 발목 때문에 어딜 가든 내 돌아갈 곳이 네가 되도록. 그렇게 마흔과 환갑을 차근차근 넘으면 나는 할아버지가 된 네 옆에 선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때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옷을 골라주는 사이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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