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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움직이는 밭 Mar 27. 2022

도시가스 없는 겨울밤을 위해

구례, 구층암

그 겨울의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웅크리고 있던 몸을 꿈틀대며 밖으로 향했다. 곧 찾아올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올해는 농사를 직접 짓겠다는 마음을 먹고 호미보다는 여행가방을 먼저 샀다. 농장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선크림과 모자를 챙겨 넣고 처음으로 장화를 구매했다. 겨울에는 농장에서 무엇을 하는지, 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갓 수확한 옥수수와 감자를 먹을 생각이 앞섰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들뜨게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차 나무를 가꾸는 구례였다. 기차를 타고 6시간에 걸쳐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구례에 도착했다. 어느새 초록빛이 가득한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생경하고도 반가운 풍경을 감상하며 화엄사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구층암'으로 향했다.

구층암에서는 차 나무를 재배한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산 중턱 즈음 위치한 사찰에서 스스로 자라고 있는 차 나무를 가꾼다. 이곳에서 따뜻한 겨울밤을 보내기 위한 일과가 있다. 조릿대 자르기, 아궁이에 불 때기, 그리고 차 마시는 것이다.




지리산 바라보며, 조릿대 잘라보며


차 나무는 4월 중순이 지나야 새순이 올라온다. 이것을 채취해 덖고, 비비고, 보관해두면 발효차가 된다. 아직 차 나무의 새 잎이 나오지 않았던 2월에는 다가올 봄에 햇빛을 잘 볼 수 있도록 주변을 준비해주는 일이 필요했다. 산 곳곳에 퍼져있는 조릿대를 자르는 일이었다.


조릿대는 최근 몇 년 동안 급격하게 번지기 시작해 차 나무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방해한다'라고 판단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냥 잘라내야 한다는 것도 어려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찻잎을 기다리는 스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조릿대를 다듬었다.

꽤 무거운 전정가위를 가지고 조릿대를 잘라내면 어느새 등짝이 따끈해진다. 엊그제 눈이 온 날씨지만 안 쓰던 근육을 쓴 덕인지 땀이 난다. 목이 아플 즈음엔 고개를 들어 지리산을 한 번 바라본다. 허리가 아프면 튼튼해 보이는 바위 위에 몸을 기댄다. 거의 누워있던 자세는 어느새 완전히 누워버린 자세가 된다. 맑은 하늘에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다 눈을 감는다.


맑은 공기와 하늘, 아늑하게 감싸는 지리산 자락의 풍경,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의 소리. 사람에게도, 조릿대에게도, 차 나무에게도 당연히 살기 좋은 곳이었다. 전정가위라는 (조릿대에겐 무자비한) 도구를 발명한 인간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영역뿐만은 아니다. 지리산 너머 마을에서, 도시에서, 어쩌면 사람이 살지도 않을 곳에서 전정가위보다 더 큰 도구를 이용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한다. 이쯤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누가 누구를 방해하는 걸까.




도시가스 없는 겨울밤



천년고찰 구층암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즈넉한 건축과 아늑한 나무 기둥, 아궁이는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세월의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건 보다 현실적인 일이었다. 겨울에는 특히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일이었다.

오후가 되면 땔감을 자르고, 정리했다. 산속에 있는 구층암은 다른 곳보다도 더 춥기 때문에 넉넉히 준비해두어야 했다. 따뜻한 물로 씻고, 따뜻한 방에서 잠들기 위해 매일 저녁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익숙하지 않았던 나무 톱질과 불 피우기 기술이 점점 늘어갔다.


도시가스가 있는 집에서 버튼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 따뜻한 겨울을 보내던 날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도시가스 없는 삶을 상상해본다. 따뜻한 곳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 도심의 빌라를 벗어나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할 일상. 사회적으로 갖춰진 시스템에서 일정 부분을 벗어나면 스스로의 삶을 가꾸지 못할 것 같았다. 모든 게 갖춰진 시스템을 과잉될 만큼 누리는 동안 스스로의 기능은 결핍되어 가는 것 같았다. 적어도 구층암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내가 사용할 따뜻한 물과 공기를 만드는 과정을 스스로 채워나가기 위해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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