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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리에 Jan 26. 2024

나는 문맹이 되었다

▶ 유방암투병 (2018.9-2019.6)


프랑스에 도착한 2016년에 나는 문맹이 되었다. 나는 문맹이라는 단어와 나를 연결시켜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전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렇게도 책을 좋아했던 나였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못지 않을 애정을 책에 가지고 있었고, 읽는 것,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였다. 한국에서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던 나였다. 학부도 영문학 전공이었던데다가 영어는 입시생들을 가르치는 강사였으며 일본어도 1년만에 빠르게 습득했었기에 외국어에 대한 나의 애착은 무엇보다도 각별했다. 


그랬던 내가 프랑스의 깡촌 마을에 살게 되면서, 하물며 교육의 평균 수준도 낮은 한 시골 마을인, 가족 전체가 문맹인 가정들도 많은 이 마을에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 한명도 없는 이 동네에서, 한국인은 40km 반경으로 살고 있지 않은 이 마을에서, 나는 문맹이 되었다. 내가 할 줄 아는 언어인 한국어, 영어, 일본어였다. 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는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읽고 쓰지 못하는 나는 그들에게 문맹이었다. 그리고 나는 1년 5개월 후, 2018년 2월 13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나는 결심했다. 문맹에서 절대적으로 벗어나자고…  


그 당시 나의 체류증은 이미 만료가 되어 버렸고 새로 갱신을 하지 못해서 나는 불법체류자의 상태로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체류증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에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죄책감은 나를 괴롭혔다. 이역만리 떨어진 프랑스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들은 그 날 나는 하루 종일 정신이 나가 있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단어만 머리에서 하루종일 맴돌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제대로 서류 처리를 하지 못한 무능력에서 비롯되어 아버지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그 날 굳게 다짐했다. 기필코 문맹에서 벗어나서 내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내가 읽고, 내가 쓰며, 그 어느 누군가도 아닌 바로 내가 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7개월이 지나고 나서 나는 유방암의 진단을 받게 되었다. 유방암이 걸리게 되었던 이유는 정서적인 고립감의 이유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프랑스 남부 시골마을에서 프랑스어만 말하는 사람들과 프랑스어를 못하는 나와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고 이것은 우울감, 정신적인 고립감을 불러 일으켰다.  언어가 고립되고 나자, 나는 겁쟁이가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겁이 났다. 내가 들으면 알수 없는 말이 오고 가기 때문에 항상 눈치를 봐야 했고, 눈치로 대화를 이해해야 했다. 이해가 잘 안되기 때문에 나의 뇌는 항상 몽상이 가득하게 되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 프랑스에서 그 나라의 언어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내 생각을 말을 못한다는 괴로움으로 받은 정신적인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나는 유방암의 진단을 받았다. 


오히려 암진단을 받고 나니 진심으로 생존 프랑스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1년 정도 걸리는 암치료였던 데다가 병원에 가는 횟수가 빈번한데 내가 프랑스어를 못한다고 유방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갈 때마다 남편이 휴가를 내고 나를 병원에 동행해 줄 수는 없었기에 말이다. 처음에는 물론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 나를 남편이 병원까지 동행해서 통역을 해주었다. 정확히는 의사가 5분을 설명해도 남편은 한두마디로 그것을 나에게 설명해주었을 뿐이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나 혼자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기 위해 의사, 간호사, 접수대에 비서들의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프랑스어 실력을 향상시켜야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에너지를 프랑스어 향상에 쏟았다. 항암치료 받으면서 저질체력이었지만 새벽 4시에는 일어나서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직업훈련센터에 가서 클라우디아 선생님에게 프랑스어도 배우며 열심히 공부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델프A2 시험을 보고 합격도 했다. 중년의 나이로서 책상에서 일어서는 순간 무엇을 읽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기억력과 암기력으로 좀처럼 늘지 않은 프랑스어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방사선치료가 끝날 무렵에는 병원에서 물어보는 최소한의 생존프랑스어는 장착하게 되었다. 


이 기간은 항암, 방사선 부작용을 비롯해 암투병을 하느라 고생을 했지만 우울한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암투병 생활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기에 프랑스어에 관한 에피소드는 훨씬 더 많았다. 




에피소드 1) 병원에서...

병원에 가기 전에 할말을 적고 중얼거리며 암기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처에 가서 비서에게 암기했던 것을 좌르르~ 하고 말했다. 아~~ 잊지 않고 잘 말했구나.. 라고 안심하는 0.1초 이후... 비서는 ‘아웃사이더’의 속사포 랩의 속도로 내가 처음 듣는 질문을 질문했다. 얼.었.다. 항상 준비했던 답 이외의 질문을 하는 프랑스 사람들… 



에피소드 2) 꾸흐또 할머니와...

같은 동네 사는 꾸흐또 할머니는 남편과 내가 결혼했을 때 머그잔을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이야기하곤 한다. 어느날이었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어로 기초적인 문장만 질문 가능할 때였다. 할머니가 어디 가냐고 물어봐서 프랑스어 배우러 간다고 대답했다. 아... 그러냐고 하면서 할머니는 10분정도 혼자 말씀을 하셨다. 중간 중간 나는 “아, 그래요?”, “맞아요” 이러면서 추임새만 넣었다. 물론 할머니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예의바른 나는 할머니의 말을 십분 가량 듣고, 이만 가야할 시간이라고 지각할 것 같다고 하니까 할머니는 나에게 프랑스어가 엄청 늘었다고 했다. (할머니 혼자 말씀하신걸요.)



에피소드 3) 아침 먹다가 비주(뺨인사) 30번...

작년 6월에 남편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거의 1세기를 사시고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갔다. 친척들이 30명 정도 참석했다. 장례를 치루고 나서 모든 친척들은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먹으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렌지 주스와 크로와상으로 된 아주 간단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빵을 한 조각 베어물자 친척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뺨인사를 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주스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또 친척이 들어왔다. 또 자리에서 일어나서 뺨인사를 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친척들.. 빵 한조각 먹다가 뺨인사 한번 하고, 주스 한 모금 마시고 뺨인사 하고... 아... 1박 2일 동안 30명이 하는 프랑스어를 듣고 있다가 결국 오바이트 했다. 집중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프랑스어였다.



에피소드 4) 모르면 다시 설명해 줄게...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내가 이해 못하면 다시 설명해 준다고 했다. 이해 못했다고 하자 똑같은 말을 천천히 말한다. (천천히 말한다고 똑같은 어려운 말을 내가 이해하겠니? 당신들도 내가 천천히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띠 아니할쌔...” 말하면 이해하겠냐고...?)


에피소드 4) ‘관사’가 없는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다.

관사가 없는 한국어.. 모든 명사는 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관사를 항상 써야 하는 프랑스어가 쉽지 않다. 암기할 때 관사를 합쳐서 외우라고 하는데 예외도 많고, 관사 생략하는 경우도 많아서 힘들다. 그런데 남편은 나에게 항상 ‘관사’가 없는 것은 프랑스어가 아니라며 구박을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 그냥 마구 관사를 가져다가 붙여서 말하면 남편이 알아서 교정해 준다.


에피소드 5) 프랑스어 델프 시험 이후.. 남편의 변화

내가 지난번에 본 델프 시험에 합격했다는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남편은 나에게 사용하는 프랑스어 단어의 수준을 높였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서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나의 단어는 업그레이드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아는 단어도 빛의 속도로 까먹고 있다. 그래도 프랑스어로 남편과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중이다. 문법은 이미 화성으로 여행갔다. 그래도 일단 말하고 본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막무가내로 말하는데 남편이 알아 듣는다. 남편의 독심술이 향상되고 있다.



에피소드 6) 주말에는 편지쓰기…

한국에서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르게 프랑스에서는 정말 편지를 많이 쓴다. 제품 반품 교환도 편지를 쓰고, 관공서에 서류 요청할 때도 편지 쓰고, 시청에 항의 편지도 쓰기도 하고, 이웃집 여자가 우리집 담벼락에 불만이 있어서 시청에 보낸 항의편지를 거꾸로 받아서 조정관과 삼자합의도 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짤막한 문자를 보내기 보다는 장문의 편지를 주로 쓰는 것 같다. 편지 쓰기의 강대국인 프랑스다. 


몇 주 전에 친동생에게 카톡이 왔다. 그러나 내가 너무 바빠서 그 날 답장을 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 카톡이 다시 한번 왔다. “누이, 잘 사는가?” 이렇게 말이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 없이 동생에게 답장을 보냈다. 


“동생아, 너의 답장 잘 받았어. 어제 내가 답장을 보내고 싶었지만 바빠서 보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미안해. 나는 요즘 무엇무엇....을 하면서 보내고 있어. 너는 요즘 어떻게 보내니? 너의 와이프와 아들은 어떻게 지내니? 다들 건강하니? .. 불라불라...


이런식으로 평소에 프랑스에서 하던 것처럼 동생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동생이 읽고 나에게 “왜 편지 써서 보내?” 라며 답장을 보냈다. 그래도 편지 제일 마지막에 쓰는 Bises 이런 인사는 뺐는데... 


요즘 주말만 되면 나는 편지를 쓰고 있다. 지난주에는 관공서에 보내는 편지를 썼고, 오늘도 또한 편지를 쓰면서 오전 반나절을 보냈다. 그리고 주중에도 편지를 쓰고 있는 나는 요즘 너무나도 편지를 자주 쓰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행정처리 할 때 직원들이 너무나 종종 빈번하게 이름이나 태어난 곳의 오류를 범한다. 병원에 갔을 때도, Pôle emploi(2024년 1월 1일 France Travail로 이름이 바뀜)를 갔을 때도, 시청에서도, 늘상 그들은 늘 나의 이름 철자를 바꿔서 쓴다.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는 나는 이번에 내가 보냈던 서류에 나의 이름과 태어난 곳의 철자를 아주 또박또박 한 글자씩 궁서체로 써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난 곳이 다른 장소로 기입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네들 이따구로 일처리 할거임?) 그래서 주말에 나는 편지쓰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 프랑스에서 사는 한 나의 편지쓰기는 계속 될 것 같다. 



에피소드 7‘윤다이’란 ?

올해 초에 멧돼지와 충돌사고로 인해서 자동차 범퍼가 움푹 파였다. 중고품 거래를 할 수 있는 사이트인 르봉쿠앙(Le bon coin)을 2주 동안 매일 들락날락 거려서 겨우 범퍼를 구했다. 그리고 수리를 했지만 멧돼지와 교통사고가 난 후로 차의 상태는 폐차까지는 아니더라도 휘발유가 적게 남아 있는 상태가 되면 갑자기 차가 도로에서 정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어쨌든 이런 상태였던 차를 몰고 8월 말에 짝궁 친구가 살고 있는 페르피냥(Perpignan)에 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저녁 9시 정도에 도로를 휙~ 지나서 차 앞을 스쳐지나가는 동물과 또 충돌사고가 났다. 이번에는 차 범퍼가 안으로 움푹 들어가서 차 상태는 거의 구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남편은 밖에 나가면 지나가는 차를 유심히 보고 다닌다.


남편 : 윤다이 est pas mal. (=윤다이가 나쁘지 않아)

나 : 윤다이? 윤다이가 뭔대? 혹시 ‘현대’를 말하는 거야?

남편 : 응. 윤다이.


현대가 윤다이로 변신했다. 현대가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윤다이라니… 정말 프랑스인 애네들 H발음 빼고 본인식으로 발음하는 구나 싶다. 한국어로는 ‘현대’, 영어로는 ‘현다이(Hyundai)’, 프랑스어로는 ‘윤다이’



에피소드 8프랑스에서 중3와 중4의 차이는?

프랑스에서는 초등학교가 1~5학년까지 있고 중학교가 1~4학년까지 있다.  Riad Sattouf(리아드 사투프) 작가의 책인 LES CAHIERS D’ESTHER 시리즈 중 14살의 이야기를 읽다가 중1, 중2, 중3까지 모두가 쏠로인데 중4가 되면 갑자기 모두가 커플이 된다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나 : 정말로 중4가 되면 갑자기 커플이 늘어나?

남편 : 내가 중학교 다녔을 때도 이랬는데... 중 4때 모두가 미친 듯이 커플이 되는거야.

나 : 그게 역사가 오래 되었구나. 전통이네. 남편도 그랬니?

남편 : 응, 당연하지.



에피소드 9왠지 자꾸 말하고 싶은 말...

지난 주말 토요일 아침에 남편이 ‘Mamadou m'a dit’라는 본인이 마음에 드는 좋은 노래를 하나 발견했다고 했다.


남편 : François Béranger 알아?

나 : C'est qui?(그 사람 누군데?)

          쎄 끼


Q. 육류 소비가 왜 감소되었는가?

A. La raison principale est budgétaire. (주요 원인은 가격에 있다.)

                    프항씨팔

aux élections municipalesdépartementales et régionales (시의원 선거, 도의원 선거, 지방 선거에서)

                       뮈니씨팔


                    



현재 2024년 1월, 프랑스에 7년 4개월째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이 시기를 돌이켜 보면 내가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로 프랑스에 정착을 했는지 놀랍다. 마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바다를 돛단배로 건너려고 했었던 것과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행정처리가 프랑스어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모든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되었다. 심지어는 내가 걸린 유방암치료에 관련된 모든 행정 절차 또한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남편이 해야 되었다. 언어를 못하는 나는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존을 해야 되었다. 이것은 남편의 어깨에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게 했다. 


‘클라우디아’ 선생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고 나는 항암 치료를 받고 이후 병원에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혼자 다니며 자립으로 한걸음씩 향해 나가고 있었다. 생존 프랑스어를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서 돛단배에서 탈출해서 뗏목을 타고 항해를 하게 된 느낌이 들었다. 암치료를 받으며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의사의 질문에 대해 최소의 응답을 할 수 있으며 오고 가는 길에 앰뷸런스 기사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생존 프랑스어는 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살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많은 행정처리에 관련된 문서들을 비롯해서 우리 부부의 인생에 일어날  대소사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생존 프랑스어는 충분하지 않았다. 프랑스를 여행한다면 그 정도로 말해도 충분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에서 사는 것이라면 생존 프랑스어는 그야말로 최소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체적으로 죽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생존 프랑스어의 수준을 이제 뛰어넘었기에 더 한단계 나아가서 프랑스에 살면서 나에게 닥치게 될 각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인 생존 프랑스어’를 익혀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나는 집에서 80km 떨어져 있는 프랑스의 남부 몽펠리에에 위치한 국립대 폴 발레리 어학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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