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동안 내 인생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관련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오히려 글로벌 의사소통의 언어인 영어가 중요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학 학부의 전공도 영문학이었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수십년동안 해왔기에 오히려 영어가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 왔다.
그러나 내가 마흔살이 되던 해에 인생 버킷 리스트였던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홀로 해외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만났던 한 프랑스 남자로 인해 나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회색빛의 나의 단조로운 일상에 찬란한 무지개빛을 가져다 준 그 남자와 남은 인생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열망에 그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하나 했을 뿐인데 그 선택이 가져온 그 이후의 변화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우선 첫째로, 나의 삶은 솔로에서 결혼을 한 부부의 삶으로 전환이 되었다. 이는 하루 24시간을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닌 남편과 나, 우리를 위한 시간으로 시간을 재배치해야 했다. 달리 말해 노동, 가사, 금전도 모두 남편과 함께 상의를 해야 했다. 솔로였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부부가 되고 나서 오히려 의무로 바뀌었다. 게다가 나의 감정과 의지와는 별개로 시댁을 포함해서 남편의 지인과 시간을 같이 보내야 했다.
둘째, 거주하게 된 나라도 한국에서 프랑스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프랑스의 법 체제에 따라 생활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의 행정 시스템을 따라야 하며 그러므로 프랑스에 체류하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프랑스의 행정처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셋째, 한국의 수도이자 대도시의 서울에서의 삶을 뒤로 하고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의 천만명을 육박하려 하는 서울의 인구에 비해 현재 살고 있는 마을의 주민수는 300명이 채 안된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마을 주민 수는 서울 인구에 비해 3만배 이상이 더 적다는 뜻이다. 편리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대도시 서울에 비해 프랑스의 시골의 주택에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이 직접 주택유지 관리 수리에 관해 나의 시간과 노동력을 갈아넣어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남편과 함께 둘이서 현재 살고 있는 집안의 베란다 공사, 셀프 시멘트 도로 공사를 직접 해왔다. 그 과정에서 주택유지 관리에 들어가는 노동을 직접 내가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꽤 시간이 걸렸다. 육체노동을 평생 해본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다만 시골에 사는 것이 위로가 되는 한가지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서울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면 고층빌딩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서 숨이 막히지만 지금 사는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고층건물 건설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광활하게 수평적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파란하늘아래 마을 전체가 다 보이기에 숨통이 트인다.
마지막으로 가장 커다란 변화는 한국어가 아닌 프랑스인 남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나는 프랑스어를 말해야 되었다. 나의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영어로 말했다면 상황이 현재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고 중년의 마흔이라는 나이에 ‘생존 프랑스어’와 함께 나의 인생의 이모작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에서 체류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인과 프랑스에서 결혼한다고 그냥 체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016년 현재 살고 있는 프랑스의 우리 동네에서 시장의 주례로 시청에서 결혼을 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그리고 서울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프랑스인의 배우자로 비자를 수령한 후 다시 프랑스에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Office Français de l'Immigration et de L'Integration라는 이름을 가진 ‘오피(OFII)’라는 기관에 나의 비자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에 체류 할 수 있다는 ‘체류증’을 발급받았다.
체류증 심사를 할 때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 간단한 테스트가 있었다. 필기시험은 굉장히 간단한 것이었고 면접을 보았다. 프랑스어를 “Bonjour(안녕하세요)”정도 밖에 알지 못하는 나에게 면접관은 ‘50시간’의 프랑스어 수업을 의무로 수강하라고 했다. 나는 50시간으로는 프랑스어를 향상시킬 만한 시간으로는 부족하니 최대치인 ‘200시간’ 수업을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그 면접관이 활짝 웃으면서 나를 좋아했다. 면접관이 왜 나를 좋아하는 지 그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되었다. 바로 옆방에서는 100시간이 너무 길고 본인은 바빠서 의무교육을 안받겠다고 큰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고 면접관들은 그런 일로 싸우는 데 지쳐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정반대였다.
저는 프랑스어를 더 공부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했으니 그 면접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언어교육기관은 어디에 위치해 있고 전화번호가 무엇이고 나중에 시민교육 받으러 오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교육기관은 우리집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구글지도에서 검색해보니 그 교육기관은 ‘직업훈련센터’라고 되어 있었다. 약속된 날에 자전거 타고 ‘직업훈련센터’를 찾아갔다. 그리하여 이 곳과 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163cm정도 되는 키에 마르고 뽀얀 피부의 얼굴이 예쁜 선생님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멜라니’였다. 여름이어서 그녀는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여리여리한 외모와는 상반되게 민소매로 덮히지 않은 등 부분이 커다란 용문신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녀는 상냥한 미소와 이곳 촌스럽고 거친 남부의 억양이 없는 분명한 발음으로 프랑스어를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프랑스어는 예뻤다. 말은 못해도 사투리 억양은 분별 가능한 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200시간을 멜라니와 함께 했다. 처음에는 이 ‘직업훈련센터’에서 예쁜 선생님인 ‘멜라니’와 함께 나의 프랑스어 실력을 엄청 향상시킬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룰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이 곳에서는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이곳에는 문맹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였기 때문이었다. 이 곳에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모로코 출신의 K는 18살에 결혼해서 모로코를 떠나서 프랑스에 왔다. 그리고 남편과 4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떠났고 그녀는 아이들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굉장히 잘 말한다. 그런데 프랑스어로 쓰여 있는 단어를 읽지 못하고 쓰지 못했다. 그러는 그녀가 하루는 연습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었다. 들여다 보았더니 23 + 35 = ? 이와 같은 두 자리 숫자의 덧셈 문제를 힘들게 3시간 30분동안 풀고 있었다. 덧셈도 힘든 그녀에게 뺄셈, 곱셈, 나눗셈은 신의 영역이었다.
홍콩 출신이며 프랑스인의 남편과 10년전에 결혼해서 현재 초등학생인 한 아들의 엄마이다. 그녀는 동사 변형 ‘현재’를 하나 암기하는 데 각 1년이 걸렸다. être(~이다) 현재형을 외우는데 1년걸렸고, 그 다음해에는 avoir(가지다) 현재형을 암기했다.
집시인 한 여성이 분홍색 실내 슬리퍼를 신고 ‘직업학교’에 나타났다. 파자마를 입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끔은 오후 2시에 파자마를 입고 돌아다니는 여성들도 종종 마주치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 분홍색 실내 슬리퍼를 끌고 온 그녀를 보고 멜라니는 야단을 쳤다. 실내 슬리퍼 신고 밖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말이다.
각자의 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 소개를 했을 때 누군가 몇 명의 아이가 있냐고 내게 질문을 하였다. 아이가 없었던 나는 “아직 아이는 없는데요. 당신은요? 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7명의 아이가 있어요.
요즘 시대에 7명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너무나 놀래서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가 잠시후 깨달았다. 그 동네는 집시들이 많이 사는 구역이었다. 원래 집시가 한명이 그 동네에 도착하면 엄청나게 많은 수로 증가한다고 했다. 내가 아는 앰뷸런스 기사가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집시 한 명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집시 식구들이 병문안을 왔다고 했다. 식구 숫자가 보통 10명 이상이었고 한꺼번에 병원에 방문해서 무료로 제공하는 비스켓과 커피를 다 털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병원에서 환자만 들어오라고 공지사항을 붙이기도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환경에서 내가 제대로 된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나의 프랑스어 수준은 생존 프랑스어는 커녕 생존하기도 힘든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수업 받는 것을 도중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멜라니와의 수업을 200시간 채워야 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7-8월의 기나긴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직업훈련학교’에서 프랑스어 수업도 방학을 맞이했다.
두 달간의 기나긴 여름방학을 끝내고 9월의 가을이 되었다. 멜라니도 수업에 복귀하고 우리도 다시 같은 장소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두 달의 여름 바캉스를 보내고 다시 일로 복귀한 멜라니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의 얼굴은 우울로 가득했다. 바캉스가 너무 길면 다시 일로 복귀하는 것이 상당히 우울하긴 하다. 예술사를 전공했던 멜라니는 체계적이지 않은 수업으로 중구난방으로 학생 한명씩 가르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문을 걸어 잠그고 울다가 화내다가 결국 멜라니는 우울의 정도가 심각해서 모두에게 아무런 말없이 ‘직업훈련기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기에 우리 모두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아침마다 그녀를 기다렸다. 매일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멜라니 없이 두달 반이 지나갔다. 나는 이곳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다는 ‘수업증서’를 받아야 되는데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수업 수료 증서를 받지 못해서 나중에 체류증 갱신할 때 그 수업 수료 증서를 첨부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겼다.
멜라니가 주지 않아서 공중부양을 해버린 수업수료 증서때문에 내가 체류증 갱신을 할 때 많은 고생을 했지만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있는 멜라니가 나는 싫지만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체계적이지 않고 서류 작성할 때 많은 실수를 하는 덤벙대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만들어온 멸치 피자는 한입 깨물자 마자 소금 덩어리를 씹어 먹은 듯할 정도로 짰다. 그러나 멜라니는 나와 함께 스페이스 인베이더인 스트릿 아티스트의 이야기도 같이 하고 모파상의 책들과 68혁명도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이 동네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프랑스어가 유창했으면 그녀와 더 많은 이야기를 깊이 있게 나누었겠지만 나의 프랑스어 실력으로는 무리였던 것이 아쉬웠다.
어쨌든 나의 생존 프랑스어 수준은 여전히 생존하기도 힘든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한 귀로 듣고 그 의미가 두뇌로 전달되지 않고 바로 반대쪽 귀로 흘러나가는 상태였으며 ‘말하기’는 단어 몇개를 알고 있지만 문장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문장 패턴 책을 구입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혼자 공부했다. 결과는 외우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것이 더 많았다. 그 마저도 수십번의 반복 끝에 암기를 해서 남편에게 말을 건네보면 나의 정확하지 않은 발음때문에 남편은 전혀 나의 프랑스어 발음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온라인 강의 수강 신청해서 혼자 매일같이 공부를 했고, 물론 100%이해는 못했지만 혼자 문법중급까지는 끝냈다. 그리고 다른 회화 책들과 델프 A2도 온라인 강의 도움으로 혼자 공부를 했다. 그렇게 두달 반이 지났다.
마침내 ‘직업훈련학교’에 새로운 선생님인 ‘리사’가 등장했다. 미풍에도 쓰러질 것 같은 예술가 타입의 멜라니와는 정반대로 키가 크고 건장한 아마존의 여전사의 포스를 가진 구릿빛 피부의 리사는 일처리가 똑부러졌다. 아침부터 술취해서 깽판을 부리려고 하는 사람과도 맞짱떠서 그를 얌전히 돌려보냈다. 그녀는 강했다. 그녀의 행정적인 서류 처리 능력은 탁월했다. 멜라니가 안주고 튀었던 수료증을 나는 ‘리사’를 통해서 받게 되었다.
그리고 리사는 처음에는 대부분 많은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곳의 수준은 알파벳 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을 비롯해서 대부분이 거의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2주도 안되어 수업은 자연스럽게 프랑스어 단어를 몇 개 정도 가르쳐 주는 수업으로 바뀌어 버렸다. 리사는 아이들을 좋아하고 길거리에서 버려진 고양이들을 주워서 키우거나 전쟁으로 인해 난민신청을 해서 온 사람들에게는 친절했다. 그런 ‘리사’와 함께 하는 클래스에서 점점 아랍인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러 왕복 20km 를 자전거를 타고 오는데 와서 배우는 것이 프랑스어가 아니라 ‘앗살라무 알라이쿰’(아랍어로 Bonjour를 의미)을 배우고 오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도 말이 많지만 아랍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말이 많다는 것을 나는 목격하게 되었다. 수업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인지라 이 때의 프랑스어 수업은 선생인 ‘리사’가 질문을 하나 하면 모든 아랍인들이 그녀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서로에게 아랍어로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게다가 그들끼리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도 아랍어로 이야기했다. 나고 물론 한국인과 여기에서 만나면 한국어로 말하고 싶지 프랑스어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어도 아랍어도 하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을 쳐다보며 관찰하기만 했다. 거기에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하루는 리사가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을 매일 목욕시켜 주세요.”라고 했다. 난 매일 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슈퍼마켓에서 계산하려고 줄 서 있다가 간혹 뒤에 서 있는 안씻은 사람들의 냄새로 인해 두통이 몰려오며 질식사를 할 뻔했던 적이 떠올랐다. 남편의 일하는 곳에서도 한명이 일주일을 씻지 않아서 너무 냄새가 많이 나서 병원에서 퇴원하던지 씻고 오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어느날 모로코 출신의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그녀가 14살이 되자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신랑감을 찾았다. 그래서 그녀가 16살이 되고 그녀는 얼굴을 본적이 없는 남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4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밖에 외출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을 봐야 할때는 남편이 장을 보거나 남편과 함께 장을 보았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참을 수 없어서 남편과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한 후 그녀의 부모는 이혼한 그녀가 수치스럽다고 연락을 끊고 더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재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재혼하고 나서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재혼한 남편은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재혼한 남편은 첫번째 이혼한 남편의 친동생이라고 했다. 형제여도 성향이 아주 달라서 재혼한 남편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며 말이다.
잠잠.... 잠깐!!! 나는 순간적으로 동공지진이 일어났다. 형과 이혼하고 친동생과 재혼이라니 이건 생각치도 못했던 스토리였다. 그들은 나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 영화보다 현실은 때로 더 드라마틱하다.
리사가 폴리가미(polygami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처음 들어본 단어였다. 폴리가미(polygamie)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폴리가미(polygamie)는 ‘일부다처제’를 의미했다.
말로만 듣던 폴리가미(polygamie)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자 나는 우물쭈물 대답을 망설였다. 남의 일이라고만 여겨서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설이는 나를 보며 리사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을 다른 여자와 공유할 수 있는지 말이다. 아니 리사샘. 그건 안되죠... 어떻게 내 남편을 남과 공유를 하나요?
이라크 출신의 한 커플이 이라크의 전쟁 때문에 난민 신청을 해서 프랑스에 왔다. 나는 난민을 실제로 본적은 처음이어서 어떤 절차를 거쳐서 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남편, 부인 둘다 25살이었던 그들은 어린 딸을 한명 데리고 이 산골 동네까지 온 것이 용기있게 보였다. 그들이 보여 주었던 한장의 사진은 아직도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살던 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모든 건물이 허물어진 곳은 사막모래로 뒤덮여 있었고 그 폐허의 건물에 앉아서 빨간 산타 모자를 쓰고 찍은 그들의 사진은 매우 가슴 아팠다.
이렇게 해서 이 기간에는 주변에 아랍인들이 많아서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랍권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리사에게는 초등학생인 딸과 고등학생의 아들이 있었다. 그녀의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들의 파업으로 초등학교가 몇번 문을 닫았다. 그래서 그녀가 딸을 집에서 돌보아야 하는 이유로 일주일에 세번 가던 우리 수업은 2주간 없어졌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방학 3주에 부활절 방학 3주로 수업이 몇달간 진행이 안되었다. 프랑스어 수업이 없는 것 대신에 한달에 한번씩 레크리에이션 수업만 진행이 되었다. 우리는 유기농 화장품을 만들거나 재활용해서 악세사리를 만들거나 비누, 세제 등...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프랑스어를 배우지 못한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했다.
이러다가 사건이 터졌다. 리사는 수준 낮은 사람들을 가르칠 수는 있었지만 중급수준 부터 그녀는 가르쳐 본적이 없었고 그리고 가르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진지하게 프랑스어를 배우고자 하는 나에게 컴퓨터로 FUN MOOC 싸이트를 알려주며 그 싸이트의 동영상 강의를 수강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절대 집에서 숙제로 하지 말고 ‘직업훈련센터’에서만 하라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다며 절대 집에서 숙제를 하지 말 것이며 복습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직업훈련센터’에서도 혼자 집에서 공부할 때와 똑같이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컴퓨터로 문제를 풀고 틀린 것도 혼자 이해했다. 리사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다른 수업 듣는 마담과 ‘본인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에 대해 사진을 보여주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질문하면 그것에 대해 설명도 해주지 않고 정말 가르쳐 주는 것 하나 없이 수업은 종료되었다. 나도 몇 달을 참고 참았는데 결국은 화가 나서 나는 리사가 없는 쉬는 시간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N에게 리사에 대한 불평을 했다. 리사에게 비단 오늘뿐만 아니라 요즘 그녀에게 배우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왕복 20km자전거 타고 와서 배운 것도 없이 컴퓨터로 혼자 공부하고 틀린 것이나 궁금한 것에 대해서 질의응답의 시간도 없이 그냥 왔다갔다하는 것은 시간 낭비 하는 것 같아서 짜증난다고 했더니 내가 집에 간 후에 N은 리사에게 모두 일러바쳤다.
이후 그날리사에게서 나는 메세지를 한통 받았다. 본인에게 불만이 있으면 다른 교육기관으로 내 서류를 토스해 주겠다고 했다. 그 다른 “직업훈련센터”는 우리집에서 45km 떨어져 있으며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고 버스가 하루에 두 대 밖에 없는 버스로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고 나서 더 이상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고 이렇게 자전거만 타고 다니면서 시간낭비할 수가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내가 어떤 검사를 받는지 어떤 과정의 치료를 받는지 나는 빨리빨리 이해해야 했다. 나는 생존하고 싶었다. 그저 몸껍데기만 아닌 나의 상황, 나의 감정, 그리고 나의 생각을 정확히 나의 입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서류를 45km떨어진 곳의 기관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클라우디아와 만남을 갖게 되었다. 비로서 나의 생존 프랑스어가 시작의 막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