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너 때문에 더럽게 힘들다 - 5편
나는 참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ㅇㅇㅇ미술작가, ㅇㅇㅇ예술교육가, ㅇㅇㅇ예술기획자, ㅇㅇㅇ보드게임 작가, ㅇㅇㅇ그림책 작가, ㅇㅇㅇ강사, ㅇㅇㅇ미술 선생님.
그리고 ㅇㅇㅇ엄마, ㅇㅇㅇ딸, ㅇㅇㅇ아내, ㅇㅇㅇ며느리.
처음엔 그런 이름들이 자랑스러웠다.
무언가 여러 일을 잘 해내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의 필요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 자존감을 지탱해 줬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 이름들이 짐처럼 느껴졌다.
하나도 나 아닌 게 없는데,
정작 진짜 ‘나’는 어디 있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누구 앞에선 ‘작가’로 살아야 하고,
누구 앞에선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어떤 자리에서는 예술가답게, 또 어떤 상황에선 생활인처럼.
나를 설명하는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찢겼다.
어떠한 것도 제대로 해내고 있음이 없다.
그래서 요즘엔 자주 고민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다 문득 떠오른 건 법륜스님의 말이었다.
불교경전대학 강의를 통해 들은 그 말.
“사람은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쓰임이 다를 뿐이다.
그때그때 필요한 역할에 맞게 살아가면 된다.
자신을 고정된 어떤 상(像)으로 묶으려 하니까 괴로워지는 거다.”
나는 너무 오래
‘예술가라면 이래야 해’,
‘엄마는 이래야 해’,
‘작가는 이렇게 보여야 해’ 같은 틀에 스스로를 묶어 두고 있었다.
그 상들이 조금씩 깨지자,
오히려 나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은사님도 나에게 말했다.
“예술은, 전시를 하거나 누가 알아주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
남들이 보든 안 보든,
예술을 하고, 예술을 가르치며, 살아내는 그 자체가
이미 예술적인 삶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해온 모든 활동들이 따로 놀았던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로 향하고 있었던 교집합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최근 유아문화예술 교육 연구 과정 중,
‘명명(命名)’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날이었다.
한국족보박물관에서 들은 이야기.
우리 조상들은 삶의 시기나 역할, 특성에 따라
한 사람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어떤 이름도 더 낫거나 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이름이 그 사람의 삶을 이루는 일부였을 뿐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가진 모든 이름들이 다 ‘나’다.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필요한 장면마다 다르게 등장하는 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요즘엔 감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엔 왜 날 몰라보냐고,
왜 내 진심을 못 알아보냐고,
그렇게 세상 탓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세상이 나를 몰라봤던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이제는
이 수많은 이름을 감당하며
조금 더 가볍게 살아보려 한다.
그게 돈이 되든, 안 되든
성공이든, 실패든
나는 그냥,
내 삶을 살아가려 한다.
다음 편 예고 - 시리즈 6편
《나는 벌레였다, 그러나》
경제적 하수구 속에서 허우적이던 나,
그래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유를 다시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