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는 절대 가치로 인식되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제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치제도로써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일부 도시국가에서 발생했지만,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했고, 오랜 기간 지구 상에서 사라졌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근대 부르주아들의 부상으로 귀족에 의해 떠 받쳐지던 왕정이 무너지면서 다시 인류사에 등장했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중요한 시스템에는 몇 가지 가정이 존재한다. 먼저 민주주의 자체는 ‘많은 사람의 생각과 의견이 善이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한 명의 생각보다는 두 명, 두 명보다는 세명, 세명 보다는 여럿의 생각과 의견이 모이면 더 좋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 지성사를 관통하는 합리적인 이성에 대한 믿음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 직접 민주주의의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발생한 ‘대의민주주의’(의회 민주주의)는 ‘똑똑한 사람이 더 좋은 善을 생산한다’는 전제를 가정한다. 그래서 과거 우리 부모세대는 실제 국회의원 투표를 할 때, 그 사람의 학력을 보고, 경력을 보고 투표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의 가정에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똑똑한 것과 善을 행하고 만들어 내는 것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지성의 발현이 공감 능력 같은 도덕적 차원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성은 공동체의 선을 만들어낼 수 없고 이기주의에 쉽게 빠져버린다. 자기를 위한 선이든, 그가 속한 집단을 위한 선이든..., 그래서 결국 ‘대의’는 반영되지 못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자체의 가정, 역시 심각한 맹점이 있는데, 그것은 ‘민의의 조작 가능성’이다. 이것은 사회가 발전하고, 정치조직과 형태가 분화하면서 선전 및 선동 활동을 통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조작 가능성’은 민주주의의 급소로, 조작에 대한 의심이 커진다면 그동안 쌓아 올린 민주주의의 탑은 한꺼번에 허물어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