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by YT

역자의 작품 서평과 작가의 연보까지 밑줄을 그어가며 꼼꼼하게 읽었다. 그에게 밑줄을 긋는 행위는 특정 문장을 그의 사고 속에 넣어두는 행위로, 긍정이던 부정이던 작가에 대한 예우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오랜만에 목구멍을 찢듯이 그 생각의 외벽을 긁으며 들어오는 소설을 만났다. 그의 읽기는 마치 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일으켰고, 소설 속에 비친 시적 정서의 정체를 작가 연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이후 보르헤스)는 평생 시를 써온 시인으로, 그의 에세이와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그의 시작의 방식들이 글쓰기에 배어 있을 것이다.

[픽션들]에 대한 두세 번의 읽기를 마친 후, 그는 잘못된 길을 따라(하지만 운 좋게도)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따라 마르케스의 안내로 ‘환상문학’의 통로를 통해 보르헤스에게 이르렀다. 수많은 알레고리의 덫이 설치된 몇몇 중요한 작품들의 외관이 환상적이고, 마술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마르케스의 환상이 역사에서 나오고, 보르헤스의 환상은 철학에서 나온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백 년 동안의 고독]과 [픽션들], 이 둘의 차이는 너무나 커서, 문학의 사조, 시대의 구분을 달리할 정도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시대를 가까운 지역에서 살았던 두 거장이지만, 그들의 문학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어느 어설픈 비평가의 글 속에서 환상이라는 단어의 환상적 아우라에 말려 보르헤스에게 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가 보르헤스를 드디어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치 감옥에 갇힌 쇼생크처럼 낮에는 생업에 몰두하지만, 밤에는 숟가락으로 자기 생각의 굴을 팠다. 여러 명의 작가와 사상으로 연결된, 여러 개의 방을 가진 개미굴은 원소 기호로 연결된 물질의 입체 모형 같았다. 비교적 간단한 고리인 환상 문학을 통해 보르헤스의 방에 도착한 그는, 니체를 중심으로 이어왔던 자기 사고의 연결과도 겹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보르헤스에 도착해서 알았지만, 그동안 푸코의 저작에서, 데리다의 저작에서 보르헤스가 인용되고, 분석의 예로 거론되었음을 그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마침내 그는 니체, 푸코, 데리다로 이어지는 사고의 틀 속에서 보르헤스라는 큰방을 위치 지을 수 있었다.

그는 [픽션들]을 쉽게 읽어갈 수 없었다. 이런 독서 경험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읽을 때,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을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한 문장, 한 단락이 던져질 때, 너무나 많은 생각들의 파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파편은 긍정과 환희로 그의 읽기에 붙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웠고, 감히 그것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좋은 책을 만났을 때(그가 생각하기에 좋은 책) 빨리 읽어내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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