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끝으로 밀기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는 [픽션들]에 실린 몇몇 단편에서 – 특히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와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을 떠 올렸다. 처음 접했을 때 그에게 상당한 충격과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창백한 불꽃]은 머리말, 한 편의 시, 그리고 그 시에 대한 (시보다 긴) 주석, 그리고 의도적으로 작성된 색인, 모든 것이 작가가 기획한 허구 위에 세워진 소설이다. 그래서 [창백한 불꽃]은 문학비평 같은 외관을 가진다. 보르헤스의 두 작품 역시 비슷한 비평서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두 거장의 작품에서 소설 양식의 끝을 보았다. 비평과 소설 그리고 놀이와 소설의 칼날 같은 섬뜩한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나보코프와 보르헤스는(사실 나보코프에 앞서 보르헤스는) 소설을 절벽으로, 끝까지 몰아간 사람들이다.
그가 좋아하는 러시아의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는 회화를 끝 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 [검은 사각형] - 비평가들에게 회화와 非회화의 경계로 평가된다. 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악령]에서 키릴로프는 자유주의 사상을 끝까지 밀고 가는 인물이다. 그에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진정한 자유는 ‘자살’을 통해 증명되는데, 자유주의자들은 말만 할 뿐, 실제로 그 극단을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신념인 자유주의를 끝까지 밀어 보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다.
자신의 작업을 끝까지 밀고 간 천재들을 대할 때면, 건조함의 지수가 절대적인 0으로 변해가던 2020년 여름 사우디아라비아, 그는 떨어진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이 가벼운 열풍에 골목을 구르던 이미지를 떠올린다. 가벼운 소음을 만들며 콘크리트 바닥을 떼 지어 몰려 다니는 붉고 흰 꽃잎 무리는 막힌 곳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방향을 틀어 다른 골목으로, 또 다른 골목으로 무한히 내달린다. 이렇게 어떤 개인이 특정 영역을 끝으로 밀어버리면, 그 끝에서 새로운 것은 잠시 멈추지만, 금방 다시 그 흐름을 회복하고 방향을 바꾸어 다시 알지 못하는, 처음 가보는 다른 골목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우주가 암흑을 개척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어쩌면 신은 자신의 세상 운영 법칙을 부겐빌레아 마른 꽃잎 속에 낙인으로 심어 두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소설이라는 장르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의 ‘끝 단으로 밀기’는 나보코프의 그것과는 다르게 보인다. 그에게 이 두 천재는 밀고 가는 출발점이 다르다. 나보코프는 ‘쓰기’를 끝으로 밀어, 운율의 게임과 언어의 놀이라는 영역을 만들었다면, 보르헤스는 ‘읽기’의 끝을 밀었다. 그의 광범위하고, 밀도 높은 읽기는 생각의 특이점을 만들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쓰기로 표현된 것이다. (역시 읽기의 비전은 쓰기다) 그래서 그의 쓰기는 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의 밀어버리는 의지와 힘은 짧은 단편으로도 충분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모두 단편이다.
이런 끝 단으로 밀어 보기에서 그 끝은 정말 끝일까? 보르헤스가 그 끝을 찍어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길을 빨리 뛰어가야 한다. 그 길의 끝에는 분명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블랙홀이 있을 것이고, 모두를 잠시 심연으로 빨아들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뒤를 향해 뛰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시간의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뒤로 뛰어야 우리는 퇴보의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이다. 우리는 블랙홀에 빠지더라도 앞으로 뛰어가야 한다. 그러면 누군가 또다시 길을 찾을 것이고, 그 길은 다른 차원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그 끝에 있으면서도, 다시 새로운 시작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