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각론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by YT

그의 독후감은 지난 주말 찾았던, 살바도르 달리의 ‘메이 웨스트 립 소파’가 3면의 거울 공간에 설치된,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시작된다. 미술관 3층 전시실에서 여배우의 관능적인 붉은 입술은 전후좌우 사방으로 무한 증식되고 있었다. 그는 작품을 접하자마자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속,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는 자극적이고 독특한 표현을 떠올렸다. 보르헤스는 친구와 나눈 대화 속 이 표현의 출처를 찾기 위해 백과사전을 뒤지는 것으로 이 단편을 시작한다.

그는 언어, 철학, 종교, 학문, 문학 등, 세상의 모든 체계는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온 날 것임을 안다. 보르헤스는 이러한 체계를 인간이 만든 거대한 미로에 비유하고 있으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0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 하찮은 것임을 드러낸다. 그에게 이것은 불교적인 깨달음의 순간으로 다가왔다. 마치 절대적인 진리처럼, 그에 앞서 오랜 기간 존재했다고 믿어지는, 마치 공기처럼 아무런 무게도 주지 못했던 진리(체계)가 한 번의 독서로, 한순간의 번쩍이는 깨달음으로 그를 짓누르는 바위가 되었다.

니체가 몇 권의 두꺼운 책으로 단행했던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를 보르헤스는 단 29페이지의 짧은 단편소설로 마무리하고 있다. 형이상학의 구름 속 곳곳에 진리라는 권위로 박혀있는 높은 밀도의 알맹이들을 보르헤스는 조그만 절구에 넣고 짓이겨 갈아버린다. 그래서 형이상학의 권위는 인간의 욕망, 인간의 손길, 그것을 단단하게 뭉쳐 놓았던 인간의 역사로 분해되어 날아가버린다. 조금도 무게를 가지지 못하는 먼지가 되어 저 우주로 날아가버린다.

보르헤스의 이 탁월한 작업은 언어와 시공간에서 시작된다. 틀뢴 행성의 언어 체계는 지구와 달라서 명사가 없다. 모든 명사는 형용사의 조합으로 설명될 뿐이다. 원래 지구에서의 ‘명사’는 수많은 주변의 희생과 무시를 통해 배타적인 의미를 지니는 알갱이다. 하지만 형용사로 만들어진 명사 대용품은 무수히 많은 동시성의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요소 간 같은 위계를 가지므로 어떠한 핵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틀뢴에서는 공간이 없다. 모든 사건은 시간의 연속에서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공간이 사라진 틀뢴에서는 시간 역시 계속 도전을 받게 되고, 결국 모든 과거와 현재는 현재의 순간 속에 수렴되는 양자역학의 세계가 된다. 1940년대 보르헤스의 단편이 21세기 최신 과학에 의하여 검증되는 것이다.

이렇게 공간과 명사가 없는 세상에서 그 바탕 위에 세워지는 모든 체계는 특이할 수밖에 없다. 틀뢴에서 모든 철학 체계는 하나의 가설일 뿐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어체계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인과성이 부정되고, 어떠한 일반화도 부정되기 때문이다. 틀뢴의 언어에는 어떤 알맹이도 없으며 흐물흐물한 뿌연 연기 같은 것으로 느껴질 뿐이다. 보르헤스에게서 형이상학은 인과율과 일반화가 무너지며 해체된다. 해체된 형이상학은 (환상) 문학이 된다. 그리고 모든 문학은 저자라는 권위가 없고, 세상의 모든 작품은 한 명의 저자이거나, 어떤 저자도 없는 것이 된다. 지구에서 20세기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유물론은 헤겔을 연상시키는 천재에 의해 철저한 관념론으로 극복된다. 이렇게 보르헤스는 거대한 관념론 체계를 틀뢴 행성의 운영 원리로 담는다.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이 만든 미로 같은 거대 체계이다.

그리고 단편은 여기서 7년의 시간을 건넌다. 이것은 매우 자유로운 구도로, 어쩌면 무책임하게 조차 보인다. 보통의 경우 추가할 부분이 있으면, 7년 전의 작품을 회수하여 그 안에 변형을 가하여 완성하지만, 보르헤스는 마치 다른 소설인 양 [1947년의 후기]라는 제목으로 이 단편을 이어간다. 그에게 그런 설정은 역시나 고도로 작가가 의도한 부분처럼 보인다. 틀뢴 행성의 확장을 얘기하고 싶었고, 그것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차라리 덧붙이는 것이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을 줄 수 있고, 또 다양함을 펼쳐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암튼 틀뢴의 잘 짜진 미로의 관념론 체계는 지구인의 모든 체계를 담고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두배인 40권의 백과사전에 담기고, 완벽한 40권의 백과사전이 우연히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논리와 체계적인 설명의 방법론이 지배하던 지구에, 엄청난 열광과 함께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다. 지구인들이 그런 체계를 급속도로 받아 들 일 수 있었던 것은 틀뢴 체계의 완벽함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체계이지만, 앞뒤 전후가 완벽하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진리 없는 세상, 신이 없어서 왠지 모르게 머뭇거려지는 세상, 알맹이 없는, 다양성의 세상이 지구에 이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7년 후에 추가된 [1947년의 후기]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포스트 모던의 단순한 해체와 파괴를 넘어, 언어와 시공간의 범주를 끌어드려 완벽한 미로를 만들었다. 그것도 짧은 단편 속에 쌓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마치 신에게 도달하고자 했던 바벨탑을 만들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바빌론 사람들은 끝내 실패하지만, 보르헤스는 다른 행성(틀뢴)에 그 체계를 완성했고, 그것은 지구로 이식되어 유행을 이끈다. 보르헤스의 재구성(틀뢴에 만들어진 체계)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해체와 비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기에 보다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지구의 재료를 분해하여 틀뢴에 새로 쌓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비판만을 수행했다면 그 역시 비판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특히 허구의 소설로 쌓음으로써 그는 비판을 피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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