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이야깃거리가 많더라도..
모든 처음은 두렵지만 설렌다는 데, 그건 좋은 일에나 들어맞는 말이다. 첫 항암은 결코 설레지 않았다. 두려움만 가득했다. 항암을 시작하기 두 시간 전,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영화 <신세계>를 봤다. 황정민 씨의 ‘X바, 브라더’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무엇이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에 더불어 ‘드루와, 드루와!’ 장면을 보고 나니, 얼른 암세포와 싸우고 싶어졌다.
내 몸에 들어오는 항암제는 총 네 개였다. 간호사님께서 그게 무슨 항암제인지,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온갖 무서운 부작용이 다 있었다. 이게 과연 치료가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지만, 간호사님의 마지막 말이 위로가 되었다.
‘부작용은 사람마다 다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부작용 없는 분도 가끔 계세요.’
가끔 있는 그 사람이 내가 되길 바라며 첫 항암을 시작했다. 30분 정도 맞으니 두피가 갑자기 가려웠다. 침상 뒤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눌렀다. 금세 간호사님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세요?”
“아침에 머리를 안 감아서 조금 가려운데, 잠깐 머리만 감고 와도 될까요?”
“아, 머리를 안 감아서 그런 건 아니고 부작용 중 하나예요.”
간호사 님은 혹시 다른 곳은 가려운 곳이 없냐고 물어보셨다. 자세히 보니 가슴 쪽에 두드러기가 붉게 올라와 있었다.
'내 몸이 힘든 싸움을 하고 있구나.'
항암을 잠시 멈추고 두드러기를 없애는 약을 주사했다. 두드러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첫 번째 항암제 주사가 끝나고는 세 가지 항암제를 동시에 주사했다. 형사님들과 깡패가 외관상으론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항암제와 독극물도 겉보기엔 다를 바가 없다. 간호사 분들께서도 장갑을 끼고 다루는 항암제가 내 몸으로 칵테일이 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칵테일이다. 아 맛 좋다.'
내가 항암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 또다시 영화를 봤다. <노킹온 헤븐스 도어>라는 영화였다. 영화엔 두 청년이 나온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마틴,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은 루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두 청년은 병실에서 만난다. 둘은 의료진의 말도 지지리 안 듣는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니, 생명을 연명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병원 주방에서 훔친 레몬과 소금을 안주삼아 데낄라를 잔뜩 마신다. 술에 취한 마틴은 바다를 떠올린다. 그리고 옆에 앉은 루디가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천국에 대해서 못 들었나? 그곳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얘기할 뿐이지. 그런데 넌 별로 할 말이 없겠다. 입 다물고 있어야지. 바다를 본 적이 없으니까.”
마틴과 루디는 결심한다.
“죽기 전에 바다로 떠나자!”
<노킹온 헤븐스 도어>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담겼다. 내가 참 좋아하던 영화인데, 이젠 남일 같지가 않다.
림프종 판정을 받고 한동안 나쁜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내게 남은 날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 순간마다 내 머릿속은 나를 사랑해 주던 이들의 얼굴로 가득 찼다. 그 얼굴이 가득 찬 공간에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것’,
‘죽기 전에 꼭 먹어보고 싶었던 음식’,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수 없었다.
그들이 왔다 간 텅 빈 공간엔 늘 하나의 문장만 남았다.
‘살고 싶다. 죽도록 살고 싶다.’
마틴은 천국엔 별다른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천국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 찬 곳이라고 하더라도, 천국에서는 눈만 뜨면 몰디브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고, 이제는 볼 수 없는 존 레논의 라이브를 언제든 들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고, 먹고 또 먹고 또 먹어도 살이 찌지 않고, 느닷없이 내가 잘 생겨져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곳에 남을 것이다. 엄마, 아빠, 누나, 아내, 친구들, 나와 인연을 맺은 수많은 이들. 그들이 없다면 천국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그러니 이 항암제야.
내 얼마든지 견뎌낼테니
암세포에게 총 공세를 펼쳐라!!
제 투병기를 보고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꼭 이겨내라는 응원의 말씀도 많았습니다.
정말 따뜻하신 분들이 세상엔 많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제가 브런치북 소개엔 밝혔는데,
2025년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완전관해 되었습니다.
현재는 항암 치료로 지친 몸을 회복 중입니다.
완전관해 판정 후 5년 동안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그동안은 제 몸 하나 건사하느라
글을 쓸 여유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적어둔 간단한 기록들을 모아서
여유가 생긴 이제야 투병기를 남깁니다.
그러니 이제 조금은 마음 편히 읽어주셔도 괜찮습니다.
암 진단을 받은 이후부터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느낍니다.
새해가 다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설날이네요.
작년 추석엔 치료 중이라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 설은 가벼운 마음으로 연휴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추석엔 완전한 민머리로 가족들을 만났는데,
이번 설엔 머리가 꽤 자랐습니다.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거운 설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