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일요일 오전 7시.
여자 셋이 사는 집의 가장 안쪽 방문이 열리고, 파자마를 입은 지오가 비척대며 거실로 걸어 나온다. 모로봐도 잠을 한숨도 못잔 칙칙한 안색이다. 지오는 푹 꺼진 눈으로 별안간 문간방을 응시한다. 지글지글 익는 눈빛이 닿는 지점은 바로 아록의 방이다. 지오가 소리없이 거실을 가로 질러 문 앞에 선다. 주먹을 가볍게 쥐고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아침 7시. 숙면 중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쾅쾅쾅!
그제야 안에서 작게, 뭐야? 하는, 잠 덜 깬 아록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오가 이번엔 두 주먹을 불끈 쥔다.
쾅쾅쾅쾅쾅쾅쾅쾅쾅!
이번엔 저 멀리 연오 방에서까지 뭐여!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아록이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얼이 빠져 있다. 문짝을 총으로 갈기는 굉음도 모자라 문전박살하며 입장한 좀비같은 몰골의 이지오. 지오는 아록이 얼이 빠졌거나 말거나 비틀비틀 걸어가 침대에 풀썩 쓰러진다.
“야.”
아록은 제 발치에 닿는 이지오의 궁둥이를 툭툭 건드려본다. 하루의 시작부터 광기를 발산 중인 제 친구가 놀라울법도 한데 아록은 그만큼 놀란 얼굴은 아니다. 이런 광기가 제법 익숙하단 뜻이다. 공중으로 승천하는 더벅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 넘기며 아록이 하품을 한다.
“우리 또라이…. 꼭두새벽부터 이런 개성 표현, 늘 그랬지만 오늘도 역시 경우가 없어.”
“너에게 임무를 주겠어 정아록….”
“거절이야.”
“성공하면 임무 성공 보수를 주지….”
“승락이야.”
6개월 째 놀고 있는 정백수.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겹가로줄 생긴 쌍꺼풀을 바로 뜨며 잘 듣겠다는듯 양쪽 귀에 제 손을 갖다댄다. 정백수의 바지런한 손놀림을 본 지오가 오늘 기상 후 처음으로 낄낄 웃는다. 웃는 뺨에 푹 파이는 볼우물을 후비려고 평소처럼 손가락을 뻗었던 아록이 이내 조신하게 내려놓는다. 동전 한닢이라도 적선하겠다는 자의 옥체를 훼손해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인신 공격은 인신 공격으로 맞받는 막역한 사이, 이대로 물러나긴 아쉽다. 뭐 하나 걸리라는 눈으로 샅샅이 훑어보던 아록이 지오의 퀭한 눈두덩에 시선을 준다.
“밤에 무슨 숭한 걸 그렇게 봤길래 눈이 이렇게 꺼졌어. 뼈삭어, 적당히 봐.”
“봤지. 시놉시스. 시나리오….”
뜻밖의 어휘에 눈을 깜짝거리던 아록이, 급 떠오르는 어젯밤의 문자에 인중을 늘인다. 난 내일밖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 발신자는,
구진욱 감독님.
지오가 써늘하게 응시하자 아록이 인중을 재빠르게 원위치시킨다. 그러나 원래 참으려면 더 웃긴 법이다. 사방팔방으로 숨이 피식 푸쉭 샌다.
“오늘, 구후진욱, 감독님. 큼. 만나러 가는구나 우리 고객니힘. 그래. 구섹파랑 비즈니스 관계가 되는게 심신이 평온한 일은 아니지.”
“나 진짜 1시간도 못 잤어….”
“저런.”
“지금 토하면 염통이 입밖으로 삐져나올 것 같아….”
“저런. 그래서 내 임무는 뭐야. 니 염통 도닥여 주기?”
“왜 아침부터 자꾸 강냉이를 자랑하지? 줘 털어버리고 싶게….”
“이이, 아가리 이거. 너 구진욱 만나서도 그렇게 아가리질 해라.”
“안 해야 되니까 너한테 임무를 주려는 거잖아….”
지오의 진지한 발언에 아록이 눈썹을 올린다. 좋아. 내 임무가 뭔지 뱉어봐. 그러자 지오가 고개를 꺾어 시계를 본다.
“지금으로부터 딱 6시간 후에, 내가 구감독을 만나러 갈 거야.”
“음.”
“나는 지금부터 너를 구감독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준비한 말들을 할거고.”
“시뮬레이션 상대? 이런 거 내가 자신있지 또.”
아록이 제 얼굴 위로 손을 갖다댄다. 샥. 손이 스치고 지나자 웃음은 소멸하고 급하게 진중이 앉는 얼굴. 지오가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아록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윙크를 한다. 입에선 짐짓 굵직한 음성이 흘러 나온다.
“안녕 이지오? 오랜만이네. 이렇게 다시 만난것도 인연인데, 영화 얘긴 차차하고, 우리 둘만 있는 장소로 갈ㄲ,”
폭포같은 과몰입 중인 아록의 발언이 멈춘다. 지오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단말마를 내지르는 탓이다. 아니약!
“구진욱은 그렇게 안 느글거리거든?”
“어머나~ 우리 친구 지금 구쎅파 감싸는고야?”
“…취소. 무효. 계약 파기. 알바비는 없던 얘기로 하세.”
“실숩니다 고객님. 제가 나아갈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십쇼.”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오가 아록의 뺨을 양손으로 덥석 쥔다. 불의의 일격에 아록이 눈썹에 힘을 주자 지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그렇게 눈에 독기 딱 품고.
“이렇게 하는거야. 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말에, 딴지를 걸어줘.”
일을 하기 전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한다.
감독들이란 어느 감독이나 다 똑같다. 투자 잘 따오고 제작부터 배급까지 한번에 촥 해줄 수 있는 거대 제작사, EJ나 쇼벅스랑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들과 못하는, 아직은 급이 안 되는 감독들이 트리플 같은 중소제작사랑 하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관객 수가 바닥을 친 이 판에서 초 저예산으로 만든 입봉작으로 300만 관객을 찍어버린 구진욱이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 들어간다고 했을때부터, 영화판은 이미 눈치싸움으로 불이 붙었다. 서로 제작하겠다고 난리였다. 그러니까 구진욱은 굳이, 시나리오까지 완성된 이 마당에, 지오가 몸 담은 중소제작사 트리플 따위를 만나 제작 제안을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굳이 트리플에 시나리오를 돌리고, 지오의 연락을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내일 1시에 보자고- 먼저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그 속을 어찌 다 알겠냐마는.
지오의 입장에서 가정할 수 있는 이 기이한 진욱의 행동의 이유 중- 가장 최악은 바로 이것이다.
나한테 뭔가 악감정이 남았어.
그래서 내 면전에 대고 제작을 거절하고….
수치심을 주려고!
이런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하려니, 심란해 잠을 설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7시부터 아록 방에 쳐들어가 나한테 딴지 걸어달라 막무가내로 군 것이고.
난 내일밖에 시간이 안 되는데
1시쯤
그럼 제가 1시에 찾아뵙겠습니다 감독님
일요일 오후 1시 3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풀세팅한 지오는 지금, 집에서 무려 1시간이나 걸려 달려온 카페 통유리창 근처에 앉아 문자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 진욱은 어제부터 뭐 바쁜일이 있는지 의도적으로 피하는건지 전화는 도통 받지를 않는다. 지오는 핸드폰을 쥐고 심각하게 글자를 찍는다.
감독님 저는 도착해 있습니다, 천천히 안전하게 오세요.|
구 치정 이슈가 있던 현 대박 감독에게 비빌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을의 삶이란….
지오는 잠시 비통해졌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큼한 웃음을 장착한다. 말끝마다 꼬투리 잡으며 깐족대는 정아록과 3시간에 걸친 혹독한 시뮬레이션을 했기 때문에 이미 멘탈은 강철로 된 무지개였다. 구감독이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오색찬란한 웃음을 지으며 무지개 반사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는데, 주변시야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지오는 긴장으로 굳는 뒷목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다.
짙은 회색 가디건 아래 흰 티셔츠와 진을 입은 깔끔한 차림의 남자.
구진욱이다.
평범한 감독들처럼 예술인의 광기나 뽐내면서 후줄근하게 하고 다닐것이지. 왜 남들과 같아짐을 거부하고 저렇게 불필요한 깔끔함을 유지하고 다니는걸까.
그게 재회한 진욱에 대한 지오의 첫감상이었다. 두리번거리지도 않는 구진욱은 지오가 앉아있는 좌석을 단번에 발견한다. 지오는 쓸데없는 감상을 싹 지우고, 뇌도 탈탈 비운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싹 비운 머릿속에, 엉뚱한 말이 느닷없이 툭 튀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 정말 갈 거야?
도대체 이게 언제 들었던 말이야. 지오는 앞뒤없이 불쑥 밀려든 대과거에 헛숨을 삼킨다.
분명한 건 이 멘트의 주인공이, 다가오고 있는 저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엉뚱한 대사가 생각나는 바람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여유 만만한 첫인사를 할 셈으로 준비해둔 멘트를 홀랑 다 까먹고 말았다. 그 사이 진욱은, 지오를 똑바로 쳐다보며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지오는 결국 버벅대다 뒤늦게 고개를 까딱 숙이고 만다.
“처음,”
뵙긴 뭘 처음 봬…?
혓바닥 이거 아주 미친놈 아냐?
수습해 이지오. 수습해. 수습. 수ㅅ,
“처음… 뵙는 것처럼, 마음이, 새롭네요.”
“…….”
“감독님 인터뷰 하신 거 많이 봤습니다. TV랑, 잡지에서. 그런데 또 이렇게 뵈니까, 처음처럼 새롭고….”
말하면 말할수록 수렁으로 굴러들어가는 인사말. 척추를 따라 땀이 흐르는 것만 같다.
속으로는 절규하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지오는 그저 활짝 웃고 있을 뿐이다. 그런 지오를 내려다보는 진욱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다. 절체절명의 이 첫인사 수렁에서 지오는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이지오는 옛날부터 미안하고 어색할수록, 뻔뻔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폭망한 인사 따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 문장을 지어내기로 한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트리플 제작팀장 이지오입니다.”
그리고 스무스하게 악수를 청해야 하는데. 혀에 이어 팔까지 미쳤는지 손이 잽싸게 안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1초. 2초. 3초. 4초. 벌써 4초. 이제 와서 악수 청하기에는 한참 늦은 타이밍이다. 뱃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망했다의 아리아에 지오는 어쩐지 저려오는 주먹을 쥐었다 편다. 그리고 간신히 손을 뻗는다. 두 손을.
“앉으세요 감독님.”
맞은 편 자리를 향해 곱게 펼쳐지는 지오의 두 손. 마치 종업원처럼 내민 그 두 손을 진욱은 가만히 내려다본다. 1초. 2초. 3초. 4초. 5초. 펼친 손이 무안해지는 5초의 공백 끝에 지오의 얼굴을 흘끗 본 진욱은,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먼저 앉는다. 지오도 내밀었던 손을 드디어 거두고 곱게 제자리에 앉는다.
뱃속에 울리는 망했다리아와 마음 깊이 퍼지는 수심가는 이미 4절까지 완창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이 슬프고 혹독한 현실이다. 지오는 자신을 똑바로 보는 진욱의 시선을 묘하게 회피한다. 눈을 보는 대신 그의 코끝을 본다. 아침에 아록과 허이허이 할 수 있다! 기합넣고 손뼉 척척 마주치며 다짐한대로, 지오는 진욱과 마치 첫 만남같은 연기를 이어나갈 셈이다.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감독님?”
가짜 구진욱이었던 정아록은 아침에 이 대목에서, ‘안 먹었다면. 지오씨가 어쩔 건데요?’ 라고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지오는 ‘그럼 얼른 드셔야죠 감독님. 제가 간결하게 끝내겠습니다.’ 받아 쳤었고. 지오는 진욱의 어떤 삐딱하고 꼬장꼬장한 대답도 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겠다?”
지는 않구나….
진욱의 핵직구에 쳐맞은 가슴뼈가 방금 부서진 것만 같다.
웃는듯 마는듯한 표정으로 강속구를 던진 진욱은, 천천히 지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뗀다. 그리고 지오가 자기 앞에 곱게 놓은 시나리오에 시선을 준다. 그제야 지오의 얼굴에서도 억지 웃음이 떨어져 나간다. 내리 깐 진욱의 눈꺼풀을 보고 있는데 진욱이 불시에 시선을 든다. 다시 마주치는 눈과 곧 튀어나갈 것 같은 심장. 지오가 작게 벌어진 입을 꾹 다물자 진욱이 고개를 기울인다.
“궁금하네요. 트리플과 제작하면 시나리오를 얼마만큼 구현할 수 있을지. 한번 들어봅시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싸늘한 목소리.
지오는 뻣뻣하게 굳는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띄우며 시나리오를 내려다본다.
만난지 3시간은 된 것 같은, 3분이.
이제 겨우 지나가고 있다.
-
60분의 1로 흐르는 시간의 속도를 논하자면, 연오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연오는 도심 가운데에 솟은 산자락에 자리한 미술관 <소담>의 큐레이터다. 직함은 큐레이터인데 사실상 관장이나 다름없다. 이 미술관은 연오의 대학시절 지도교수였던 노교수의 소유다. 그는 교수 퇴직을 하며 가진 재산을 탈탈 털어 인생의 버킷리스트 두 가지를 이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미술관 개관이었다. 학부때부터 늘 이연오가 내 애제자다 애제자다 하시더니 정말이었던 모양인지 그는 준학예사 자격증 겨우 딴 연오에게 대뜸 소담의 큐레이터를 맡기고는 반년만에 홀연히 한국을 떠나 버렸다. 버킷리스트 두번째인, 와이프와 세계일주를 실현하러. 역시 코리언은 혈연 지연 학연이라고. 어디 가서 나름대로 번듯한 미술관의 큐레이터라고 자기 소갤 하면 꽤 그럴싸하므로 남들은 부러워도 하지만, 연오는 이 자리가 딱히 즐겁지만은 않다. 이유는 단연.
“…하암.”
미치게 심심한 까닭이었다.
연오를 제외하고 미술관에 상근하는 정식 직원은 딱 두 명뿐인데, 그나마도 한 명은 지난 달에 출산 휴가를 들어갔다. 남은 한 명은 입이 아주 천근만근이다. 하루에 세 마디 이상 안 하는 그의 격한 과묵에 연오는 차마 가벼운 입을 조잘조잘 비벼볼 생각도 못했다. 관람객이라도 또 많으면 몰라. 이 산자락 미술관 <소담>은, 하루 관람객이 많아봐야 스무명 내외인 곳이다. 날이 궂으면 다섯명도 채 안 된다. 토요일인 어제처럼 연오 개인 사정-숙취-로 하루 출근을 못해도 아무런 사고가 생기지 않는다. 윤과묵씨에게 카톡으로 어제 관람객 스코어를 물었더니 9명요. 라는 짧은 톡이 되돌아 왔다.
일요일 오전 10시.
연오는 오늘도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은 미술관의 자물쇠를 풀며 중얼거린다.
“오늘도 1분이 1시간 같은 차원의 틈새, 대~ 개장~”
활짝 열린 미술관 정문.
그러나 연오를 반기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오늘도 뜰의 참새들 뿐이다.
“짹짹이 원투쓰리? 잊지 않고 언니를 찾아왔구나.”
연오는 손에 든 봉지를 부스럭거린다. 이것은 매일같은 루틴의 시작이었다. 봉지 안엔 잘게 부순 건빵 조각이 들어있다. 연오가 빵부스러기를 참새들에게 곱게 흩뿌린다. 그 찰라의 순간만큼은 공기는 비단결이고 연오 얼굴은 춘향이 저리 가라. 영화로 따지자면 정통 멜로에서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바로 그 순간, 상대 배우 클로즈업샷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찰라의 샤랄라한 영점 몇초가 지나자, 장면은 서스펜스로 바뀐다. 연오의 머리 위로 시커먼 새떼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일 이 시간에 빵 날리는 연오를 기다려왔던 비둘기들. 뜰에 내려 앉은 그들은 우람한 어깨로 자그만 참새들을 밀치고 우악스럽게 건빵 조각을 쪼아 먹는다. 이것이 날건달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팔짱을 낀 연오는 아련한 눈으로 비둘기 사이에 낀 참새들을 쳐다본다.
“이게 다 자연의 섭리란다 꼬마들아. 강해져야지.”
작년 크리스마스, 연오에게 빨간 쿠션 파란 쿠션을 나란히 선물받은 지오와 아록은 떨떠름하게 연오를 보았다. 그리고 TV에서하는 나홀로 집에2를 향해 동시에 손가락질을 한 바 있다. 저기 언니 나온다고.
비둘기 아줌마.
강한자만이 살아남으리니. 연오가 새떼들을 향해 불끈 쥔 주먹을 거세게 흔든다. 그리고, 1분이 1시간 같은 요지경 소담의 안으로 들어선다.
큐레이터라면 바쁜게 정상이다. 그러나 한번에 한 3개월씩하는 기획 전시를 내걸고 나면, 전시 한 달쯤부터는 사람이 좀 루즈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관객이 이렇게 없는 미술관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소담>에서는 지금 젊은 예술가들의 자화상을 전시하고 있다. 그래도 전시 초반에는 작가의 지인들로 보이는 관객이 좀 있더니 전시 중반을 넘어서자 또 뜸해지기 시작했다. 백수는 아니지만 백수급으로 할 일이 없다. 덕분에 진짜 집에서 노는 백수의 왕 아록과 연락을 하루 종일 하는 일이 잦다.
언니 이따 몇시에 와
우리 파묘 보자
무료 VOD로 풀렸음
그거 무서운거 아냐?
죠 들어오면 봐야지
너랑 나랑 둘이 어떻게 봐 무서워서
이죠...
이죠 오늘 늦을텐데
왜
왜왜
왜왜왜ㅇㅗ애
오늘 구감독 만나러갔잖아
아
그거랑 늦는거랑 무슨 상관
뭘 모르네
옛정이 원래 질기고 무서운 법이자나
그게 뭔 정이던간에
별 생각 없이 찍어 보낸게 틀림없는 아록의 말에, 텍스트를 내려다보던 연오는 갑자기 멍해진다.
옛 정이 원래 질기고 무서운 법이지.
연오가 천천히 시선을 든다. 컴퓨터 옆에는 연오가 제일 좋아하는 폴라로이드 사진이 스탠드 홀더에 끼워져 있다. 자기애 투철한 연오답게, 남의 사진 아니고 자기 사진이다.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는 얼굴엔 행복 이외의 감정은 전혀 읽히지 않는다. 폴라로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을 향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
그 놈과 얽혀 있는 다른 모든 물건은 버렸는데.
차마 이 사진만은 못 버렸다.
감상에 젖은 눈으로 사진을 향해 손을 뻗는 연오. 그러나 사진까지 가지 못하고 손이 멈춘다.검지가 허공에서 힘없이 까딱인다.
꼭 제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을 가만히 건드리는 것 같은 움직임이다.
“…어떻게 버려.”
연오가 깊은 진심을 한숨처럼 흘린다.
“내가, 너무 예쁘게 나왔는데….”
순도 백퍼센트 진심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연오가 손을 더 뻗는다. 제 웃는 얼굴을 손가락으로 찍고는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사진 하나는 기깔나게 잘 찍었지. 인정.
야 나 늦어봐야 8시야
연장 챙겨놔라
자기 없이도 우리끼리
공포영화 한편 조질 수 있다는 거
이죠한테 보여주자고
좋아써
정아로기와 이년ㅇㅗ의 힘을 보여주자고
이 년이
어허
욕을 하네
지는
나는 오타징
녀ㄴ오 언닝
앗 ㅎ
오타라니깐
우리 아로기
검지에 살이 많이 쪘네
저녁에 좀 썰어주까
아잉
사랑해 언닝
그럼 8시에 보게 세팅해놓음 되는거지
ㅇㅇ 8시까지 어캐 기다려
시간 드럽게 안 가
아직도 2시밖에 안 됐어
벌써 2시야?
얼 나 2시 5분에 이죠한테 전화해야 되는데
왜? 지금 제작 미팅중이라며
그러니까 제작 미팅 중이니까
자기를 악에서 구해달라 이거지
이따 봐 온니
연오가 푸스스 웃고는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새파란 아침부터 둘이 마주앉아 일생 일대의 상황극들을 하더니. 하여튼 십몇년을 지들끼리 질리지도 않고 잘 논다. 기지개를 켜고 눈가를 꾹 누른다. 주위엔 다시 적막이 찾아온다. 일요일 오후 2시, 오늘도 관람객은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출근한지 4시간 지났는데 나흘은 지난 것만 같다.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연오가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웃고 있는 제 얼굴 폴라로이드에 시선을 준다. 잠잠히 보다, 사진을 뒷면으로 고요히 돌려놓는다.
오늘따라 내 얼굴이 눈에 안 들어오네.
다른 얼굴이 생각나고 지랄이야.
-
아침에 정아록과 한 그 혹독한 훈련이 다 무슨 소용이었단 말인가.
제 말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 것이라고 짐작했으나 웬걸. 구진욱은 딴지는 커녕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앉아 이따금 미간을 좁히거나 눈썹을 짝짝이로 만들 뿐이었다. 아는가? 1시간을 언쟁으로 흘리는 것보다 독백으로 메꾸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차라리 딴지를 거는게 나았다. 무지개반사를 쓰고싶어도 반사할 딴지가 없어서 불가능한 절망의 60분이여.
그래도 팀장 아무나 다는거 아니라고, 속은 이럴진대 겉으로는 티가 거의 나지 않는 지오다. 시종 여유롭게 웃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애잔하게 패이다 마는 볼우물을 보면 이것이 영업용 억지 웃음임은 확실했다. 호적메이트와 이씨와 명예 호적메이트 정씨는 알아챌 이 비즈니스용 스마일을, 구 섹파 구진욱은 아마도 못 알아챌 테지만.
지오가 마른 입술을 축인다. 종반부로 치달은 이 웅변을 이만 마치려는 시도를 해본다.
“<그 집에 산다>는, 그 동안 우리 영화사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소재를 담고 있으니만큼. 그에 적절한 제작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트리플이 대형 제작사만큼의 자본을 동원할 수는 없지만.. 여느 제작사보다 단단한 팀웍과 합으로 감독님의 연출 의도에 맞게, 인력과 상황을 구성해 나가는데는 최적의 제작사라고 자부합니다.”
지오가 생글 웃고는 입을 꼭 다문다. 웅변 종료. 땅땅땅.
사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팀웍이고 나발이고 돈이 최고인 것이다. 이지오가 만약에 구진욱 입장이었잖아? 뒤도 안 돌아보고 일어섰다. EJ가 끌어올 수 있다고 제시한 투자금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금액으로 무슨 영화를 찍냐고 꼽을 줘도 백만번은 줬을 것이다. 그러나 진욱은 내내 말이 없다. 나는 이만 일어나고 싶은데. 1시간이 진짜 1년 같았는데. 지오가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핸드폰을 흘끗 본다.
2시 2분. 혹시나해서 아록에게 2시 5분에 전화를 때리라고 했다. 3분만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
지오가 테이블 아래에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맞잡았다 푸는데, 진욱 목소리가 들린다.
“제안이 너무 추상적인데요.”
“…네?”
“내가 1시간 동안 이지오씨 말에 받은 느낌은. 니 영화, 우리가 제작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지오가 침묵하자 진욱은 반응을 보듯 지오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혹은. ‘회사’는 몰라도, ‘나는’. 너랑 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엑스 텐. 명중이다.
여태까지 당신의 침묵은 이 한 발을 꽂을 추진력을 얻고자 함이었는가.
진욱의 이 한 마디에 결국 지오가 무너진다. 그렇게 티가 안 나던 지오의 심란함이 드디어 티가 나기 시작했다. 지오는 이를 한번 꾹 물었다 놓고는 웃었지만, 애써 웃고 있다는 걸 이젠 누가봐도 알겠다.
“무슨 말씀을. 같이 일할 기회를 주시면, 회사도 저도, 더없는 영광이죠 감독님.”
억지 미소와 함께 지극한 비즈니스적 응대. 지오를 빤히 보던 무표정한 진욱의 얼굴에서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환한 미소는 결코 아니나 오늘 처음 보는 웃음인 것도 맞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아로기
010-XXXX-7910
지오는 구원의 폰콜을 비호처럼 낚아챈다. 진욱에게 양해의 눈빛을 발산하고 전화를 귀에 갖다댄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아록은 느물느물 웃기부터 한다. 오~ 아직 만나고 있는뒈~ 지오가 씩 웃으며 통화 음량을 몹시 낮춘다. 그리고 일적인 통화인 양 극존대로 아록에게 응답한다. 이어지는 통화 내내 회사에 몹시 급한 일이 생긴 듯한 인상을 뿜뿜 풍긴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먼저 일어나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진욱이 픽 웃는데, 그 픽이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온다.
진욱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더니 팔짱을 낀다. 뭐가 재밌는지 웃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지오의 열띤 표정 관리를 비웃는 중인 것 같기도 하고.
“바쁘면 그렇게 하셔야죠.”
“감사합니다. 그럼 부디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지오가 정중하게 말을 맺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볍게 인사를 하려는데 진욱이 손가락을 테이블에 톡 두드린다.
“명함을 못 받았는데요.”
“아. 명함.”
굳었던 지오가 그대로 가방에서 명함을 한장 꺼내 내민다. 쓸데없이 긴 손가락이 명함을 쥐고 천천히 가져간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명함에 뭐 특이사항이 있다고. 진욱이 안에 적힌 글자를 유심히 내려다보는 바람에, 지오는 벌 서는 것처럼 진욱 앞에서 정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진욱의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이거 업무용 번호야?”
이 인간은 왜 존대했다 반말했다 사람을 찬물에 담갔다 뜨거운물에 담갔다 담금질이지. 말로 뼈때리는 무두질에 존대 하대 담금질에 철판처럼 휑휑해지는 지오의 가슴. 가슴은 못 부여잡으니 가방끈을 꼭 부여잡고 웃는 수밖에 없다.
“그건, 일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질문인데요 감독님.”
이제 할 일도 다 끝났겠다, 안으로 죽여놨던 원래 성격이 튀어나온다. 입장이 이래서일뿐. 이지오도 보통은 아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산뜻한 인사 끝엔 진욱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카페를 나와버렸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지오는 허으, 하며 얼굴을 쥔다. 끝났다. 제작은 못 따낼 것이 틀림없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최악은 아니었다. 중간에 부정맥이 몇번 온 것 같긴 한데….
급히 나오다보니 카페 정문 출입구가 아니라 후문 출입구로 나와버렸다. 지오는 벽을 끼고 카페를 커다랗게 돌아 천천히 걷는다. 나 오늘 1년치 무리했다…. 저녁은 무조건 매운 닭발…. 시름에 젖어 동거인들에게 문자를 하려던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꾹꾹 눌러놨던 지오의 입술이 툭 튀어오른다.
“4885…?”
끝자리 4885. 눈에 익은데. 요 며칠 국세청인척, 세금이 고액 체납됐다 사기 치는 스미싱 전화가 몇통 왔는데 그 번호 끝자리가 4885랑 비슷했던 것 같다. 너 잘 걸렸다. 성질 폭발할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은 지오가, 최대한 불량하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 ……. ]
“여보세요. 뭐야.”
[ ……. ]
“4885. 4885 너지?”
이런 빠가사리같은 새끼 전화하지 말라니까 야 너는 내가 반드시 추적해서 삼시세끼 나랏밥 멕이고 만다, 를 장전하고 쏘려던 바로 그때. 수화기 너머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려 지오는 입술을 멈추고 만다. 그 픽이 아까 지오 심장을 푹찌른 그 픽이랑 영 비슷해서. 엄습하는 불안감에 지오가 말을 멈추자 수화기 너머에서 중저음이 넘어온다.
[ 4885가 누군데? ]
“…감독님?”
[ 네. 납니다. 처음처럼 새롭네요, 일 안 할때 목소리는. ]
아까 지오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구감독의 음성. 동시에 어디선가 느껴지는 뺨이 근질근질한 시선.
지오가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시선의 출처는 머리 하나 위였다. 계단 위에 자리한 카페의 유리창 안. 진욱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지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웃고있는 것 같다. 지오는 잽싸게 시선을 회피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어쩐지 얼이 빠져 있는 것은 어쩔수 없다.
“감독님 번호가, 이게 아니었는데?”
[ 이건 내 업무 외 핸드폰이거든. 4885. ]
“어….”
[ 다음에도 처음처럼 받을 겁니까? ]
말문이 막힌다.
빈정거리는 건지 진심인 건지. 좀처럼 구분이 안 가는 웃음 소리가 음성에 섞여 들린다.
[ 업무용 번호는 따로 없는 모양이네. ]
“…….”
[ 잘 가요. 이지오 씨. ]
이지오, 씨. 묘한 사이를 둔 말을 끝으로 전화가 먼저 끊어진다.
명함을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욱.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지오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걷기 시작한다. 카페 밖으로 진욱이 곧 나올 것이다. 평상심이 이렇게 흐트러진 지금 또 마주칠 수는 없다. 경보로 걷던 지오는 길을 지나는 택시 한대를 급하게 낚아챈다. 지오가 뒷좌석에 홀랑 오른 순간, 진욱이 카페 정문을 밀고 나온다. 지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목적지를 외친다.
아저씨!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밟아주세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쓰러졌어도 모자랄 판에, 중간에 회사에 들러서 안달내는 대표에게 구감독과 미팅이 어땠는지 보고까지 했다. 물론 계산 칼같은 이지오답게 희망고문같은 건 안 했다. 제작 못 따낼 것이다 포기하시라 짤없이 잘랐다. 그리고 퇴근을 했어야 했는데 회계짬밥 전자두뇌에게 SOS를 외치는 회계팀의 정산도 도와주고, 그러다보니 어영부영 회사 간식으로 저녁도 때워버렸다.
나의 먹부림은. 나의 여가는. 나의 워라밸은!
지오는 제게 없는 것들을 갈망하며 구슬피 귀가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니 현관문이 다 안 닫혀 있다. 뭘 그렇게 급하게 들어갔는지 쓰레빠 한 짝이 현관문 틈에 끼어 덜 닫힌 것이다. 지오는 혀를 끌끌차며 조용히 문을 연다. 집안이 어두컴컴하다. 빛나는 건 오로지 TV 화면 뿐이다. 지오가 문을 닫으려던 그때 TV에서 공포영화의 효과음이 들린다. 소파에 붙어 앉아 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오들대는 둘은 아직도 지오의 입장을 모르고 있다.
오늘의 스트레스를 두 동거인에게 풀어야겠다는 발칙한 생각이 든 지오의 안면이 음흉해진다.
발소리를 한껏 죽이고 걸어간다. 화면에서 혼령이 튀어나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두 인간들의 어깨를 쥐면 아마 혼절 직전까진 갈 것이다. 소파 등받이 바로 뒤까지 걸어갔는데도 아직 기척도 모르고 영화에 몰두한 이씨와 정씨. 영화는 한바탕 으악한 난장을 끝내고 다시 긴장이 점차 고조되는 무드였다. 지오가 이 영화 이미 봐서 아는데, 귀신 다시 나올때까진 앞으로 씬 다섯개는 지나가야한다.
기다리기가 지루해진 지오는 불시에 어깨 쥐기 대신 다른 전략을 쓰기로 한다.
맞붙은 둘의 머리 사이에, 고개를 서서히 거꾸로 들이민다.
스으으으.
둘은 아직 모른다. 스피커에서는 실톱으로 쇠를 긁는것 같은 기분 나쁜 소음이 확대되는 중이다. 지오는 고개만 거꾸로 까꿍하긴 아쉬운것 같아 눈 흰자를 많이 보여주는 디테일을 추가하기로 한다.
스으으으으으으.
나란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빨파 연오 쿠션을 하나씩 안은 둘은, 갑자기 머리 위에서 지는 불길한 그림자에 눈을 위로 치켜 떴다가.
“으아ㅏ아아아아악!”
“아아아어마앙어아!”
집 무너지는 귀곡성과 함께, 지오의 수척한 안면으로 반짝이 연오를 마구 난타한다.
지오가 연오와 아록 사이에 끼어 앉아있다. 지오를 강타한 빨파 반짝이 연오는 거실 구석에 사선으로 처박혀 엎드려 뻗쳐하는 엄벌에 처해졌다. 아록은 화면에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갈 듯 심각한 얼굴이고 연오는 얼굴을 이불로 반은 가린 채 벌벌댄다. 그러다 무서운 장면에서는 쥐어뜯을 쿠션 연장이 없어 허둥대다 옆에 있는 지오의 팔을 쥐어뜯는다. 지오는 팔을 불시에 한번씩 쥐어뜯기고 나면 연오와 아록의 팔에서 찰싹대며 모기를 잡는다. 모기. 모기가 있네 여기. 자기는 그 팔 쥐어뜯지도 않았는데 자꾸 같이 모기잡히는 게 억울한 아록이 이를 악다물고 웃는다.
“4월인데. 벌써 모기가 있어 친구야?”
“그럼. 내 팔 다 쥐어뜯은거 안 보이니 친구야.”
“이런 싸가지없는 모기 새끼. 약 갖고와.”
“귀찮어. 손으로 잡자.”
그리고 또 팔을 찰삭대는 지오의 손을 아록이 붙든다. 지오가 웃으며 반대 손으로도 치려하자 또 붙든다. 불꽃튀는 눈웃음 싸움이 이어지는 사이, 연오가 으헉, 비명을 지르며 지오의 등을 와락 껴안는다. 밀린 지오가 아록의 어깨로 엉겁결에 다이빙한다. 연오는 지오의 등을, 지오는 아록의 어깨를, 아록은 둘을 안은 채 사이좋게 한덩이가 된 셋의 입에서는 차례로 와아악 소리가 튀어나온다.
“아 쟤 너무 무서워!”
“아 언니가 더 무서워!”
“아 둘다 개 무거워!”
지오가 침대에 풀썩 엎어진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들었다가 무심코 통화목록을 확인한다.
구진욱 감독님
010-XXXX-4885
4885.
아 나 이걸 저장을 해야 돼 말아야 돼.
지오는 4885 번호를 눈싸움하듯이 째려본다.
- 다음에도 처음처럼 받을 겁니까?
그 말은, 다음에도 전화를 하겠다는거잖아 이 번호로.
- 업무용 번호는 따로 없는 모양이네.
그리고 내가 투폰 쓰는지 원폰 쓰는지는 왜 확인을 하고 난리.
- 잘 가요 이지오 씨.
잘 가요. 했다. 다음에 보자 또 보자가 아니고, 잘 가요.
반말했다 존대했다 지 멋대로. 지 개인 폰 번호 알려주고 또 전화하겠단 뉘앙스를 주더니 다시 안 보겠다는듯 잘 가라고 파워 종결. 이 인간은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인간이야.
구진욱이 옛날에도 이런 알 수 없는 인간이었던가.
“알 리가 있나.”
정확히 기억나는 건 섹스밖에 없는데.
지오가 핸드폰을 던지고 벌렁 드러눕는다. 의도적으로 회상을 피했는데 어쩔수없이 과거가 밀려든다. 그래. 구진욱이 잘하긴 했다. 심하게 잘했지. 그러니까 하룻밤 실수 후에, 우리 이거 실수였어 그치 어색하게 핫핫하 웃으며 영영 페이드아웃 하지 않고 윤리와 상도덕을 내팽개치고 또 잤지.
그것도, 내가 먼저 연락해서.
“아아아! 아아악!”
지오가 사지를 버둥거린다. 남한테 발설하기 싫은 흑역사였다. 이 역사를 낱낱이 아는 건 세상에 세 사람. 당사자인 구진욱, 이지오, 그리고 이지오가 나불나불 불어 알게 된 정아록 밖에 없다.
어쨌든 그건 다 과거다.
지금은 과거의 몸정도 다 날아갔을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할 때만큼은 다시 없을 님같았던 서로지만, 끝나고 나면 그때도 쌩 남이었기도 했고. 그러니까, 연락이 오든 말든 처음처럼 계속 뻔뻔하게 굴 거다. 구진욱이랑 나는 처음부터 남이었고. 앞으로도 남일 거고. 구진욱이 머리에 소주 꽂지 않은 이상 트리플이랑 영화를 제작할 일도 없을 거니까.
합리적인 사고를 끝마친 지오가 안심하고 이제 자려고 이불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던 그때,
진동이 울린다. 한번으로 안 끊어지는 것이, 전화였다.
뭐지. 불길하다.
지오는 웅웅 떠는 폰을 쥐고 발신자를 확인한다.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다. 설마하니 구진욱이 폰을 세개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고. 이번에야말로 스팸인가. 지오는 미심쩍은 눈으로 번호를 바라보다 통화버튼을 민다.
“여보세요?”
[ ……. ]
“여보세요. 누구세요?”
상대의 무응답에 지오의 목소리가 금방 불량스러워진다. 스팸 맞나봐. 이 빠가사리 새끼 너 한 마디만 해봐라 어디.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 잡아다가 내 세금으로 지은 미지근한 나랏밥을 삼시세끼 멕여 줄테니까. 드릉드릉 발사하려고 푸르르 풀던 입술이 뚝 멈춘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소음과 함께 들린 여보세요, 가, 지오가 아는 음성이기 때문이었다.
[ 여보세요? ]
“어?”
[ 소리에 딜레이가 있네. 지오야. ]
지오가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난다.
또 다른 인물이 과거에서 불쑥 튀어나온 탓이다.
“우태….”
지오의 호적메이트와 15년간 연인이었던 사람.
지오와도 법으로 맺은 가족이 될 뻔했던 사람.
파혼으로 찍힌 점 하나에, 연오와 10년 만에 영영 남이 된 사람.
[ 어. 나야. ]
이지오의 엑스 형부,
우태윤 되시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