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이 살고 있습니다
삐삐삐삐 삐-
“아잇씨.”
삐삐삐삐 삐-
“아으 왜 안 열려어.”
삐삐삐삐 삐-
세 번째 에러다.
밖에서 현관문 비밀번호를 잘못 찍어 나는 경고음만 벌써 세 번째. 이쯤 되면 거실 소파에 멀쩡히 착석해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일어나 현관으로 나가볼 법도 하다. 그러나 목이 늘어질대로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이 현관까지 마중 나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소파와 혼연일체가 된 둘은 그 누구도 먼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늘은 금요일 밤. 두 여자가 심각하게 보고 있는 TV화면에는 요즘 제일 핫하다는 금토 막장 드라마 절체절명의 순간이 방영중이라서다.
삐삐삐삐 삐-
“이게 비밀번호가 아니라구? 왜?”
네 번째 에러 소리와 함께 들리는 현관문 밖 여성의 고성방가. 팔짱을 끼고 앉아 막장의 정점을 시청 중이던 두 사람 중 왼쪽에 앉은 여자, 지오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심드렁하게 입을 연다.
“니네 언니 왜 저러냐.”
그 말에 오른쪽에 앉은 여자, 아록이 콧방귀를 뀐다.
“니네 언니잖아.”
“저것이 우리 언니라고.”
“그렇지. 이지오 언니 이연오.”
“그래 그러니까 ‘내’ 언니 아니고 ‘우리’ 언니라고. 이연오. 이아록 언니 이연오. 우리 20년 전 맺은 도원 결의를 벌써 잊었나.”
“하 참나, 친구야 나는, 명예. 명예 이씨. 내 이름 정아록. 정정철씨의 외동딸 정아ㄹ,”
익숙한 성전환 시도에 익숙한 철벽 방어. 그러나 아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오가 허공으로 주먹을 치켜든다. 화면 속 여자 주인공이 상대방에게 따귀를 날리기 직전이다.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대는 주인공을 보는 지오와 아록의 입에서 동시에 구호가 튀어나간다.
“지금이야!”
둘의 외침을 들은 것처럼 화면 속 주인공은 상대방의 안면에 불꽃 따귀를 스트라이크. 악당같은 상대역의 뺨에 적중하는 손바닥을 보며 소파에 앉은 둘은 거센 박수를 친다. 그 사이 밖에서는 계속 비번을 헛 찍고 있었다. 이번이 일곱번 짼가. 세번만 더 틀리면 30분간 비번 입력 차단이다. 급기야 흐엉엉 왜 안돼 왜 안 열려 우는 소리까지. 발음이 다 씹히는 것이 오지게 취한 것 같다. 탁자에 놓인 꼬깔콘 봉지를 북 찢은 지오가, 이번엔 바깥에서 떡이 되어 우는 자의 성전환을 시도한다.
“그럼 저 언니가 정연오임.”
“이연오가 아니라 정연오란 근거는?”
“나랑 안 닮았잖어. 차라리 너랑 더 닮았지.”
“참 나 무슨, 너랑 더, ”
아록이 차마 말을 못 맺고 멈칫한다. 꼬깔콘을 입에 문 지오는 제 엉덩이 옆에 놓인 빨간 빤짝이 쿠션을 들어 보인다. 블링블링한 쿠션 표면엔 활짝 웃는 연오가 있다. 프린트된 건 연오 얼굴이지만 쿠션 소유주는 이지오. 자기애라는 것이 폭발한 연오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지오와 아록에게 하나씩 하사하신 물건이다. 지오는 뻘건 쿠션, 아록은 퍼런 쿠션으로. 뻘건 쿠션에 프린트 된 연오 얼굴과 그 옆으로 바짝 붙인 지오 얼굴을 왔다갔다 왕래중인 아록의 동공을 본 지오, 손으로 꽃받침을 만든다.
“닮았냐 나랑?”
하루이틀 보는 얼굴도 아니고. 친절한 비교 없이도 둘이 손꼽만큼도 안 닮았음은 아록도 안다. 덩치가 작고 피부가 흰 언니 연오는 한 붓 그리기로 그려도 그릴만큼 얼굴을 이루는 선이 가늘고 날렵한 반면, 체격이 크고 가무잡잡한 지오는 이목구비가 크고 얼굴을 이루는 선이 굵직하고 시원시원했다. 이연오와 이지오가 생판 남에게 자신들이 자매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할 정도. 쿠션과 지오 사이를 횡단하던 아록의 동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닮은 정도로만 따지자면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록이 하얗고 가느다란 연오와 외형은 더 닮았음이다.
“그래. 연다. 이아록이 연다 열어.”
결국 일어나 현관 앞에 선 아록이 팔짱을 낀다. 짐짓 심각한 얼굴로 현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밖에서는 비밀번호를 아홉번째 잘못 찍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뭐야. 누구세요.”
“나야아.”
“대답은 이름 석자로 받습니다.”
“여노 언니이.”
“이름 석자라고.”
“이, 여, 노!”
“당신이 이연오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 우리 언니는 비번을 아홉 번씩이나 틀리지 않아.”
현관 비번은 8864다. 팔팔에 육십사. 노멀한 이연오였으면 아록의 딴지에 당장 열라고 문을 걷어찼겠지만, 밖에 있는 것은 불행히도 술이 떡이 된 어브노멀한 이연오다. 아록의 진지 먹은 취조에도 착실하게 대답하는, 떡이 된 이연오.
“아니, 야. 우리 비번, 88에 63 맞자나? 근데, 이게, 비번이 안 맞어. 고장이야.”
“팔팔에 육십삼이라고?”
“그러치.”
“구사는.”
“삼십이.”
“칠육?”
“사십팔.”
아록의 흔들리는 동공과 꼬깔콘을 짝짝 씹는 중인 지오의 흥미 진진한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이 미친 산수 고자가, 우리의 언니가 틀림없나?”
“자네 기억 안 나는가? 수능 올 1등급에 수리만 8등급 찍은 지독한 문과생 이연오를.”
“아차. 그러했지.”
문밖의 떡이 우리 언니인게 틀림없구만.
아록이 예고도 없이 현관 문을 발칵 연다. 문고리를 잡고 서 있던 떡연오가 안으로 딸려 들어온다. 지오가 소파에서 상체를 쑥 내민다. 비틀대는 연오를 향해 한 손을 대충 흔든다.
“엉니 왔넹.”
“나 와써~”
몹시 성의 없는 환대에도 연오는 허헝 환하게 웃는다. 신발을 벗으며 소파쪽으로 뛰어오려다 그만, 현관 턱에 걸려 앞구르기를 한다. 아록은 어이쿠, 팔짱을 풀고 지오는 손에 든 꼬깔콘 봉지를 떨어뜨린다.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은 연오의 동공이 혼절한 자의 그것처럼 스르륵 뒤로 넘어간다. 눈꺼풀이 차르륵 닫힌다. 그리고 5초 후. 거실엔 코고는 소리가 파열한다.
자빠진 김에 뻗어 자는 이 낙천적 만취 인간에게로 지오와 아록이 슬슬 다가온다. 둘은 무의식의 사경을 헤매는 연오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록이 아랫입술을 꾹꾹 누르며 지오를 흘끗 본다. 지오 역시 입에 남은 꼬깔콘을 목 안으로 넘기며 아록을 흘끗.
“…….”
치열한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이제부터 이 떡인지 인간인지의 사지를 쥐고 침실로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옮겨본 경험치로 둘 다 알고 있다. 하체가, 상체보다 훨씬 무겁다는 것을.
눈치를 슬슬 보던 둘은, 어디서 휘슬이라도 분 것처럼 동시에 상체를 숙인다. 둘 다 연오의 팔을 잡으려고 상체로 달려든다. 지오보다 아록이 한 발 빨랐다. 아록은 연오의 어깨를 양손으로 움켜쥔 뒤 겨드랑이 아래에 자기 두 손을 이미 끼워 넣었다. 상체 차지에 한발 늦은 지오는 아록의 팔밑으로 기어들어가려는 시도를 해본다. 그러자 아록이 턱으로 지오의 정수리를 콱 찍는다. 찍힌 지오가 머리를 문지르며 버럭한다.
“아 내가 상체 할래.”
“하고 싶음 먼저 쥐셨어야지.”
“니가 상체랑 더 가까운데 서 있었거든?”
“천만에 둘 다 정확히 반걸음 떨어져 있었거든.”
“내가 상체 들래. 아 나 오늘 열네시간 일하고 왔다구 이 백수야.”
“그래서 이 백수가 니 대신 현관까지 다섯 걸음 걸어줬잖아.”
“이왕 걸은 거 방까지 열걸음만 더 걸어주라구.”
“친구야 난 법적으론 이 떡이랑 남이야. 서로의 호적을 공유하는 사이로서, 이 시루떡의 하중은 니가 조금 더 부담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니?”
법과 호적 타령엔 장사 없다. 지오가 결국 혀를 차며 아록의 팔밑에서 빠져나온다. 패배자는 터덜터덜 연오의 하체로 향한다. 집까지 오는 길에 어디서 굴렀는지. 연오가 입은 청바지 밑단이 흙투성이다. 퍼질러진 연오의 두 다리 힘겹게 양옆구리에 끼운 지오가 흐억 신음을 내지른다.
“아 이거 그때 시집을, 그냥 갔어야 했는데!”
버럭 지른 지오의 말에 아록이 움찔한다. 고개를 꺾어 식탁에 한편에 올려놓은 달력을 본다.
4월 25일.
날짜에 멎었던 아록의 시선이 지오를 향한다.
“언니 파혼한 날이 이 즈음 아닌가?”
“아직. 그건 다음 달이야. 야 좀 잘 들어봐.”
지오가 아록을 향해 턱짓을 하자 아록이 둘셋, 구호와 함께 연오를 들어올린다. 둘은 떡이 된 연오를 끙끙대며 방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중간에 거실 가운데의 책장에 골반을 쿵 한번 부딪혔지만 연오는 그래도 세상 모르고 잔다. 깨어난 연오가 정체불명의 골반 멍을 의문한다면, 아록과 지오는 동시에 금시초문이란 안색을 지어보일 것이다.
제 방 침대 위에 연오가 마른 인절미처럼 널린다. 눈으로 침착한 욕을 하며 연오의 양말을 벗겨주는 지오의 등을 향해, 아록이 묻는다.
“0425. 0425도 입에 익은데. 오늘도 무슨 날 아니야?”
“0425. 그러네. 날이네.”
“뭐지?”
“처음.”
“처음?”
“처음. 형부, 아니지. 형부일 뻔 했던 사람이랑, 처음 연애 시작한 날.”
“그러네. 우리가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
“내 말이.”
지오가 연오의 양말 두짝을 하나로 돌돌 뭉쳐 뒤로 던진다. 얼굴로 날아드는 양말 공을 엉겁결에 손으로 쳐낸 아록이 제 손바닥을 보며 입꼬리를 내린다. 지지. 손바닥을 지오 팔뚝에 스윽 문지르고는 한숨을 쉰다.
지오와 아록이 연오 방의 불을 꺼 준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푸푸 잠든 연오만이 남았다.
파혼 후 2년.
연오는 여전히 종종 술이 떡이 되어 돌아오고, 그런 연오를 챙기는 것은 같이 사는 두 동생의 몫이다.
-
이연오와 이지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톱만큼도 닮은 구석이 없으나 둘은 친자매가 맞다. 때는 한국나이로 열둘, 초등학교 5학년. 그 시절 학원 친구 이지오의 집에 팔랑팔랑 놀러가게 된 어린이 정아록은, 그날 개교기념일이라 학교 안 가고 파자마차림으로 퍼질러 앉아 만화 보던 중1 이연오를 향해 해맑은 인사를 건넨 전적이 있다.
- 안녕? 니가 지오 동생이니.
연오에게 인사하는 아록을 보고 지오는 말없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연오는 만화보다 말고 콧구멍을 씰룩 거렸고. 대체로 착하고 모범생인 편이나 가끔 주체할 수 없는 돌아이 기질이 올라오는 이 자매는, 작심하고 무려 석 달동안이나 아록을 속이며 그런 척 했다. 이지오가 이연오 언니인 척. 이연오가 이지오 동생인 척. 석달 후의 어느 날 학원을 땡땡이 친 이연오가 교복 차림으로 집안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록은 정말. 연오가 지오의 동생인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사실이 밝혀지던 날. 학원이 파한 후 집에서 배 깔고 엎드려 지오와 만화책이나 탐독하던 아록은, 교복을 입고 현관에 선 연오를 보고 얼어 붙어버렸다.
- 니 동생 왜 교복 입었어?
해명을 요구하는 아록의 엄청난 시선에 연오는 머리를 긁었고 지오는 태연하게 눈을 깜빡였다.
- 동생 아니니까?
- 뭐?
- 사실 우리 언니야. 지금 중1.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 니가 처음 보자마자 내 동생이냐길래. 재밌어서 좀 속였어.
이지오는 옛날 옛적부터 미안할수록 더 뻔뻔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지오가 평이한 어조로 건넨 그 고백에 보기보다 거세게 휘청이는 것은, 양심이 대쪽같은 어린이 아록이었다.
- 너보다 한뼘이나 작은데?
- 너 나 키 작다고 지금 무시하니..?
아록은 연오의 억울한 보이스를 무시하며 비탄의 혼잣말을 이어갔다.
- 사실은 중학생 언니였다고..? 허..으..
두 살 위 언니인 연오를 석달이나 동생 취급한 자신에게 실망해 눈물까지 글썽이던, 그 대나무같던 어린이 정아록. 연오는 아록의 글썽글썽에 크게 당황했고, 지오 역시 낯빛에서 태평함이 싹 가시고 말았다. 뭐 이딴 일에 우는 애가 다 있어. 지오는 엉엉 울기 시작한 아록을 아무 말로 토닥이려는 시도를 했다.
- 야, 야 울지마.
- 흐어어어엉.
- 알았어 속여서 미안해.
- 어어어엉. 어떠캐.. 속일 수가 있어...
- 아 미안하다니까. 그만 울어.
- 어어어엉어엉.
- 야. 속은 너도 이상해. 아무리 키가 더 작아도, 그냥 딱 보면 언니가 언니잖아.
- 어어엉어어엉, 난 언니 없어서 그런거 잘 모른단 말야. 나도 언니 있었으면 알았지이. 나도 언니 있고 싶었다고.
어쩐지 애처로운 여러 마디를 떨어뜨리고 점점 더 크게 우는 아록을 두고, 연오는 결단을 내린듯 아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아록아. 그럼 내가! 니네 언니 해줄게.
저 여자가 뭐래 지금. 눈을 깜빡이는 지오에게 연오는 빨리 장단 맞추라는 듯 눈으로 열심히 사인을 보냈다. 지오가 얼결에 아록의 어깨에 손을 얹고 국어책을 읊었다.
- 그래. 그럼 우리랑 이제부터 자매하자 아록아.
- 그래! 뭐 엑스 자매 의자매. 그런거라도 하자고.
계속 쿨쩍이던 아록은 그 말에 거짓말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 그럼 나 맨날 놀러와도 돼? 가족이니까.
- 어어.
- 그래라.
- 저녁도 먹고 가도 돼?
- 그려 먹어.. 먹구가.
- 신난다.
- 다 울었니?
- 킁. 응. 다 울었어.
내심 형제자매 있는 집 자식들이 부러웠던 아록은 그들이 되는대로 집어 던진 위로의 미끼를 덥석 물어 뜯고 삼켰다. 연오는 토닥이던 손을 멈추며 지오를 쳐다보았다. 너는 뭐 친구라고 데려온 게 이런 너같은 도라이냐는 얼굴이었다. 지오는 자업자득이다 언니라는 얼굴로 연오를 마주 쳐다봐주었다. 그들은 의미없는 눈빛교환 끝에 빠르게 체념했다. 곧 셋은 서로의 어깨를 감싸안고 무지랭이같은 도원결의를 시작했다.
- 그래 우리는 이제부터 의자매여. 거 뭐 삼국지 보면 나오는거 있잖아.
- 우와 지오야 연오 언니는 삼국지도 읽었나봐. 똑똑하다.
- 안 똑똑해. 만화 읽은겨. 줄글 아니고 만화.
- 시끄럽고. 어서 도원결의를 맺자. 관우 조조 장비.
- 장비가 아니라 유비 아니야 언니?
- 그래. 그럼 나 관우. 너 조조. 아록이 유비.
원래 도원결의에는 조조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지식이 참 깨끗한 친구들이었다.
어쨌든 관우 장비 유비의 도원결의는, 관우 조조 유비의 얼척없는 도원결의로 탈바꿈하여 의자매의 첫역사를 열었다. 그 때부터다. 이연오-이지오-이아록, 가끔씩은 정연오-정아록-정지오나 정연오-정아록-정지오가 되는 이 역사는. 그 후로 20년을 넘게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서로를 있는 듯 없는 듯 취급하는 찐자매처럼 보내고 나니, 어느덧 맏언니 연오의 나이가 서른 여섯이었다.
서른 여섯 이연오는, 재작년에, 그러니까 나이 서른넷에- 결혼을 할 뻔 했다. 햇수로 15년을 만난 애인과.
그러나 복합다단한 사정으로- 품절 직전, 환불되었다.
이후의 1년 동안 우울해에 잠겨 익사 직전이었던 연오는 '기분 전환'을 위해 가진 돈을 탈탈 털고 대출을 꼭대기까지 땡겼다. 그리고 방 3개짜리 고급 빌라를 덜커덕 매입했다. 이 과소비를 두고 인생 말아 먹을 기분 전환이라고 험한 평을 내린 지오와 아록은,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연오 집에 뻔뻔하게 입성했다. 벨을 누르고 인터폰에는 사람이 없길래 연오가 나가보니,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은 다 떨어진 냉장고 박스가 하나. 그 안에는 지오와 아록 둘이 사이좋게 꾸겨져 있었다. 겉면에 '부디 잘 키워주세요 이름은 지오. 아록입니다.' 매직으로 삐뚤빼뚤하게 쓰여 있는 것을 보고 연오가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콧구멍을 벌렁거리자, 둘은 오케이 신호라도 받은 듯 벌떡 일어나 이 집이 자기들 집인양 걸어들어왔다.
그리하여 이 '(의)자매 셋이 살고 있습니다'가 곧 8개월 째를 맞는 것이다.
-
아침의 활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의 연오가 거실로 퀭하게 걸어 나온다. 거실 바닥을 딱 두 걸음 밟고는 위장을 부여잡으며 비틀댄다. 새가 둥지 튼 머리로 아침의 상쾌를 만끽하며 식탁에 앉아있던 아록, 바나나를 까서 입에 넣으며 수척한 연오를 향해 눈썹을 세운다.
“마마. 기침하셨사옵니까.”
“오냐.”
“언니.”
“왜.”
“구구단을 외자.”
“갑자기?”
“팔칠?”
“…육십삼?”
“한결같다, 응, 한결같아.”
아록이 감탄하며 바나나를 입에 우겨 넣는다. 그때 지오가 드라이어를 손에 든 채 욕실에서 튀어나온다. 바빠서 눈에 뵈는게 없는 지오가 연오를 스치다 어깨를 툭 치고, 연오는 바람개비처럼 한 바퀴 반을 펄렁펄렁 돌아 소파에 벌렁 드러눕는다. 아록은 평온하게 다음 바나나를 꼭지에서 떼며 지오를 향해 목청을 높인다.
“바나나 하나 까줘?”
“됐어!”
“내 동생 토요일인데 이 시간에 출근해?”
“대표가 갑자기 보쟤!”
어느새 옷을 다 입은 지오가 방에서 튀어나온다. 바빠서 정신 없는 사람치고는 완벽하게 스타일링한, 반짝반짝 윤이 나는 짧은 웨이브 단발 머리와 쓰리 피스 수트 차림. 바나나 먹는 인간 둥지와 떡에서 갓 환생한 인간 하나가 홀로 휴일 출근하는 동거인에게 손 저으며 인사를 건넨다.
“올때 메로나.”
“올때 선지해장국.”
지오가 둥지와 떡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둥지는 바나나 먹다 목 막힌 소리로 불평을 쏟아낸다.
“아 거 메로나 좀 사다달랬다고 아침부터 험악하시네.”
“옳소. 우우우우.”
“어이쿠 실수. 프롸미스의 약지를 든다는게 그만.”
어쩐지 보는 입장에서는 매한가지로 기분나쁜 네번째 손가락을 들어보인 지오가 배시시 웃고는 현관문을 나선다. 아록은 바나나를 씹으며 지오가 나간 현관을 가리킨다.
“저건 여우시끼지.”
“인정.”
“이건 햄스터시끼고.”
“길바닥에 나앉구 싶어 아록이 쉐끼?”
“어유! 총명해 우리 언니. 술 다 깼구만.”
아록이 연오를 향해 폈던 손가락을 곱게 접으며 웃는다. 연오는 몸을 둥글게 말며 끙끙 앓는다. 아 속쓰려. 아아아 내 쓸개.
“그러게 혼자 먹지 말고 우리도 부르지 그랬냐.”
“너네 어제 드라마본다고 내 연락 다 씹었잖아.”
“뭐. 어제가 그런 심란한 날인줄 알았나, 언니한테.”
아록의 직구에도 연오는 눈을 감고 미동도 없다. 입맛을 쩝 다시고 머리 위 둥지를 쓱쓱 쓸어넘긴 아록이 눈을 휘며 웃는다. 만들어낸 경쾌한 목소리가 흐른다.
“언니 쓸개 달래야지. 해장국 고?”
“응. 선지로, 고.”
“좋았어. 그 전에 사람부터 만들어야겠다. 지금은, 형태가, 사람치곤 아직 너무 떡같자너어.”
통통 뛰어 다가온 아록이 소파에 널브러진 연오를 일으킨다.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일어난 연오를 일으켜 욕실로 향한다.
구름 낀 토요일 오전. 영화제작사 트리플의 사무실에는 날씨에 딱 맞는 흐느적한 재즈가 흐르고 있다. 휴일 출근을 휴일 휴무만큼이나 보장하는 업계에 적을 두고 있다는 것은, 오늘 사무실에 나온 인간이 지오 하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하나도 안 화창한 봄 하늘을 배경으로 한껏 거무튀튀한 표정을 자랑하는 직원 두셋이 지오를 향해 곧 숨질듯한 인사를 한다. 그들보다 늦게 나온 죄로 아메리카노를 사온 지오가 그들 앞에 커피를 내려놓는다. 인간 생피 빨듯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애도의 눈짓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오는 목을 가다듬고 대표 이사실 문을 두드린다.
“어. 들어와.”
“대표님.”
“지오씨? 앉아.”
지오만큼이나 말끔하게 세팅한 단발 머리를 귀에 꽂은 대표가 우아하게 웃으며 손짓을 한다. 지오가 소파에 착석하자 대표가 얼굴에서 침착함을 싹 지우고 몸을 기울인다.
“지오씨.”
“네 대표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감독이 우리 제작사를 고를 확률. 몇프로나 될까?”
“냉정하게요?”
“냉정하게. 나 지오씨 계산 칼같아서 좋아하잖아.”
지오의 미간이 좁아진다. 제작 회계 짬밥 3년, 실수를 모르는 전자두뇌가 풀로 돈다. 턱에 생장하는 지오의 호두를 은근한 눈으로 보고 있는 대표. 지오의 호두가 탁 터지자 대표가 침을 삼킨다. 지오가 손가락 다섯개를 촥 펴보이자 대표가 손뼉을 짝 친다.
“오십프로?”
“설마요 대표님.”
“오프로?”
지오가 생글생글 웃으며 주먹을 다섯손가락 옆에 댄다.
“영점오프로. 예상합니다.”
“음~ 졸라 칼같아~”
대표가 허리를 세우며 사뿐한 비속어를 턴다. 익숙한듯 고개를 끄덕이는 지오를 보던 대표가 두 손을 무릎에 모으며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래. 근데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영점 영오프로 아닌게 어디야. 그치?”
지오는 대체로 냉정하고 현실적인 이 CEO가 갑자기 왜 얼어죽을 낭만주의를 표방하는지 불안하다. 그리고 지오의 불안한 예감은 대체로 적중률이 높다.
“지오씨 제작 팀장 달고 첫 일이야.”
“첫 일이라 하심은.”
“감독한테 영화 제작 제안 해보자.”
“어떤 감독에게?”
“입봉작에 관객 삼백만 찍은 사람.”
무릎에 곱게 두었던 지오의 손가락이 안으로 말린다. 대표는 상큼하게 웃으며 입술을 모은다.
“구,”
“쿨럭. 쿨럭쿨럭.”
“진욱.”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가 헛기침을 하는 지오를 두고 대표가 눈을 키운다. 지오는 잔기침이 남은 목을 쥐며 어색하게 웃는다.
구진욱.
대박 감독이란 말부터 불안 불안 했지만, 대표 입에서 기어이. 구진욱 이름을 듣게 되다니.
“구감독이 지금 차기작을 놓고 제작사들이랑 컨택 중에 있단 말이지.”
“…….”
“우리 트리플이 강소 제작사들 중에선 제일 앞서 나가잖아.”
이게 무슨 못생긴 애들 중에 내가 제일 잘 생겼다는 자기주장인가. 지오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고른다. 대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적절한 어휘를 골라야만 한다.
“음. 대표님. 구 감독 차기작 탐내는 공룡 제작사가 한 둘이어야 저희 명함을 내밀죠. 뭐 EJ도 있고 쇼벅스도 있는데. 저희가 대뜸 머리 들이민다고 어디 머리카락이나 보이겠,”
그때 대표가 손으로 지오의 말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가져오는 것은, 두툼한 종이뭉치. 지오 앞에 쓰윽 들이미는 종이뭉치 위에는, <가제: 그 집에 산다> 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뒤로 구르다 봐도 시나리오였다. <가제: 그 집에 산다> 라는 글자 밑에는 잘못 볼 수도 없게 <극본: 구진욱> 이라는 다섯 글자가.
“지오씨. 내가 어디 계란으로 바위 패자는 이성 실조한 인간이겠니? 오늘 아침에, 구감독 쪽에서 먼저 이걸 보냈어 우리한테. 그래서 지오씨 급하게 호출한 거고.”
“시나리오를, 먼저, 보냈다구요? 구감독 쪽에서.”
“그래. 지오씨 말마따나 EJ나 쇼벅스에나 보내고 말 시나리오를, 왜 우리한테까지 돌렸겠니? 종이 아깝고 시간 아깝게. 우리랑 할 의향도 있다는 거지.”
“그건 그렇네요.”
“안 기뻐 보인다?”
“아뇨? 기쁜데요?”
“이팀장.”
“네.”
“너 구감독이랑 아는 사이지.”
“아뇨? 모르는 사입니다. 전혀.”
“왜, 구감독도 한국대 연영과 나왔던데. 둘이 얼추 학번도 비슷하지 않나? 지오씨가 올해 서른 넷. 구감독이 올해 서른 여섯인가 서른 일곱인가.”
“동문이긴한데, 그냥 이름만 아는 사이예요.”
“어~ 이름은 아는 사이야?”
말렸다. 말렸어.
지오가 대표의 오소리같은 눈빛을 피해 눈알을 굴린다. 그러나 대표가 굴러가는 지오의 눈알 방향으로 시나리오를 던지듯 민 것이 더 빨랐다.
<가제: 그 집에 산다 >
<각본: 구진욱>
지오가 하는 수 없이 시나리오를 쥐자, 대표가 잽싸게 박수를 친다.
“좋아. 우리 제작 팀장이랑 이름도 아는 사이에 동문이라는 인연도 있으니까, 가능성이 0.5프로에서 5프로까진 올랐겠지? 연락해봐. 당장 내일이라도 시간 된다고하면 빠르게 만나고.”
“내일은, 일요일인데.”
“일요일 뭐. 교회 가니?”
뜻을 관철하자마자 웃음을 싹 지우는 대표의 표독에 지오가 여태까지의 미적임을 지우고 잽싸게 대답한다.
“가능한 빠르게 만나겠습니다. 일요일이라도.”
그러자 대표가 시나리오 위에 진욱의 명함을 탁 올려놓는다.
영화 감독 구 진 욱
시나리오 위에 가마 탄듯 올라앉은 명함을 떨떠름하게 본 지오가 억지로 웃음을 짓는다. 조금도 흥겹지 않음에 볼에 패이다 마는 우물이 무척, 애잔하다.
고등학교 동창과 스무살부터 연애해 20대를 전부 한 사람으로 채운 언니 연오와 달리 동생 지오는 틈만 나면 사람을 갈아 치웠다. 왜 이상형이 무엇이냐 물으면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는 애들 있잖아. 이지오가 딱 그랬다. 이성에 대해 마땅한 취향이 없다는 데 특이점이 있었다. 이 관대한 편식 없음은 오는 사람을 좀처럼 안 막았고, 덕분에 고등학교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열손가락 열발가락을 다 접어도 접을 가락이 모자란 연애의 횟수를 기록했다. 이 노편식 박애주의자가 도덕심마저 없었더라면 희대의 미친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악명을 떨쳤겠지만. 지오는 천만다행으로 도덕적인 편이었다. 연애할 땐 딱 한 사람만 봤다.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했으나 차이는 것은 대체로 지오인 편이기도 했다. 이유는 한결같았다.
- 넌 무심하고 정이 없어.
- 난 너랑 만나면서 늘 외로웠어.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대개 다른 애인을 옆구리에 끼고 지오를 떠났으니, 연애 내부의 감정적 사정이야 어쨌건 외부적 사건으로 봤을 때 지오의 잘못은 전혀 없었음이다. 지오는 늘 떳떳했단 말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엔 예외가 있는 법.
이지오 34세. 34년을 살면서 단 하나의 떳떳하지 못한 치정사를 대라면, 떠오르는 이름이 딱 하나 있다.
구진욱.
지오도 진욱도 H대 연영과 출신이었다. 2학년에 작곡과에서 연영과로 전과를 했다는 진욱은, 지오가 입학하자마자 군기 바싹 잡던 적통 연영과 선배들과는 좀 달랐다. 지오는 그냥 전과로 굴러들어온 선배 정도로만 그를 알았고, 진욱 역시 후배들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불러주는 적극적 인싸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오 말마따나 둘은 그냥저냥 이름만 아는 사이로 2년을 보내고- 그대로 학교를 졸업할 뻔 했다.
4학년 2학기. 그 4학년 2학기가 없었더라면. 정말 그럴 뻔 했다.
1년을 휴학한 진욱이, 지오와 함께 그 마지막 학기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누구한테나 당당하고 떳떳한 이지오가, 고작 문자 하나 보내면서 이렇게 머리 쥐어 뜯을 일은 없었을텐데.
“하, 참나. 돌아버리겠네.”
돌아버리겠네만 벌써 9회째. 지오는 모두가 떠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죄없는 검지손톱을 아작내는 중이었다. 의자 위에 얹은 양반다리. 양반다리 위에 얹은 폰을 뚫어져라 째려보던 지오가 퓨즈가 딱 끊어진 표정으로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써. 써. 보내버려. 뭘 고민해? 그냥 감독한테 보내는 거야. 나랑 아무 관계 없는 감독. 어차피 우리랑 일 안 할 대박 감독. 못 먹는감 찔러만 보는 거야 지금. 그래.”
염불 외던 혼잣말을 뚝 멈춘 지오가 뇌를 비우고 화면을 내려다 본다.
안녕하세요 구진욱 감독님, 플래닛 제작 팀장 이지오|
이지오에 멈춰 있던 커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구진욱 감독님, 플래닛 제작 팀장 이지오입니다.
두 차례 전화 연락 드렸으나 부재중이셔서 부득이 메시지를 남깁니다.
보내 주신 <가제:그 집에 산다> 시나리오를 읽었습니다. 플래닛에서 감독님께 제작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 자세한 말씀은 감독님을 직접 만나 뵙고 드렸으면 합니다. 메시지 보시면 이 번호로 회신 부탁 드립니다.|
지오는 이를 깍 물고 눈으로 재빠르게 문자를 훑는다. 몇가지 어휘를 교정한 뒤 에라잇, 전송을 눌러버린다.
“답장 안 올거야. 보나마나 쇼벅스에서 제작한다고 하겠지.. 그래 확실해. 그럼.”
셀프 진정을 마친 지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시나리오 읽고 구진욱한테 보낼 문자 고민하느라 벌써 토요일 하루가 다 갔다. 지오는 어둑해진 4월의 거리를 내다보며 가방을 을러멘다. 책상에 놔둔 두터운 시나리오를 흘끗 보고 뒤돌아섰다가, 통통한 입술을 한번 씹고 다시 책상을 향해 몸을 돌린다.
책상 위에 놓인 진욱의 시나리오.
어쩐지, 감이 안 좋다.
답장이 안 와야하는데 올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단 말이다. 심지어 저 시나리오를 놓고 갔다간, 일요일에 이거 가지러 회사에 다시 출근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불길한 감이 지오의 발목을 잡는다. 말인 즉슨, 내일 저 시나리오를 들고 구진욱을 만나고야 말 것 같은 요상한. 촉이. 하체를 팍팍 옭아맨다 이 말이다.
지오가 씹던 입술을 뱉고 시나리오 뭉치를 콱 쥔다. 가방 안에 쑥 집어 넣은 뒤 쿵쿵대며 사무실을 나선다.
8864*를 아무리 눌러봐도 문이 안 열린다. 벨을 눌러봐도 대꾸없이 조용하고. 인상을 꾸긴 지오는 연오와 아록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으나,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수신거부 했다. 잇단 거부 사태에 이 인간들이 집안에 상주하고 있음을 확정 지은 지오는 이를 악물고 현관문을 스니커즈 앞코로 찬다. 쾅쾅쾅. 아니나 다를까 문 바로 너머에서 낄낄거리는 두 웃음소리가 들린다.
“빨랑 문 열어.”
“누구시죠? 저희가 아는 분이 아닌데.”
지오가 큰숨을 내쉬고 발길질을 멈춘다. 계속 열라고 주장해봤자 무한정 길어지기만 할 뿐이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게 빠르다는 걸 지오는 지긋지긋하게 잘 안다.
“이 집이, 이연오, 이지오, 이아록 세자매가 사는 집 아닌가요?”
“바로 찾아 오셨소이다. 저희 집엔 어쩐 일로?”
“내가! 바로 그 가운데 낀 이지오외다!”
“노노노. 아니야. 당신은 이지오가 아니지. 이지오는 메로나를 사온다고 했는데 당신은 빈손이라고.”
“그래. 내 동생 지오는 선지 해장국을 사온다고 했는데 당신은 빈손이라고.”
당신은~ 당신은~ 이지오가~ 이지오가~ 아니야~ 아니야아~
문안에서 들리는 둔탁한 2성부 돌림노래에 지오가 피곤한듯 고개를 꺾는다.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배달 어플을 켜 문구멍으로 들이민다.
“다 시켜라 이 깡패들아.”
“예스. 딴 말 하기 있기 없기.”
“없기.”
“하늘땅 별땅.”
“퉷.”
그러자 문이 안에서 벌컥 열린다.
“귀가를 환영합니다 자매님.”
“홈 스윗 홈. 어서 지친 몸을 뉘이시게.”
둘을 차례로 째려본 지오가 둘의 얼굴에 퉤 침 뱉는 시늉을 한다. 연오는 쉭쉭 피하고 아록은 어우 춱춱해~ 닦아낸다. 둘 사이를 거침없이 가르고 지나간 지오가 가방부터 바닥에 패대기 치자, 연오와 아록은 양손을 벌리고 지오 뒤를 졸졸 따라온다.
“선지는 아까 먹었어. 언니는 족발이 땡겨. 근데 족발만 먹겠다고하면 보쌈이 서운해하니까 반반으로. 족보세트.”
“메로나는 너를 한 번 배려해 본 말이었어. 배려의 대화법이랄까. 이왕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 된 거면 난 슈팅스타 하프갤런이야.”
지오는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움과 동시에 핸드폰을 뒤로 던진다. 연오가 허우적 핸드폰을 붙잡자, 아록은 연오의 어깨 위로 시시덕거리며 들러붙는다.
“아니아니 여기서 시켜 언니, 이 집은 양이 적더라고.”
“그르까? 야 리뷰 쓰면 막국수도 준대.”
“오 개꾸울~”
어플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꽁냥댄다. 지오가 아록보다 생일이 빠르므로 연령상 셋의 가운데 낀 것은 지오이지만, 실질적 가운데는 아록이다. 시의 적절하게 지오에 붙었다 연오에 붙었다 하는 균형잡힌 저 박쥐 감각의 소유자. 지오는 연오 얼굴 쿠션을 가슴에 안고, 공허한 목소릴 낸다.
“정박쥐. 정여노. 나 영화판 뜰까?”
둘은 바로 주문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고개를 든다.
“저거 왜 저래 갑자기?”
“팀장 됐다고 회사에 뼈를 묻겠다던 지난 주 이지오는 어디가고.”
“감이 안 좋단 말야.”
“무슨 감?”
그때 진동이 지잉 울린다. 지오를 보고있던 아록과 연오가 동시에 손에 든 폰을 내려다 본다.
“야. 너 문자 왔는데.”
“뭐!”
지오가 빨간 빤짝이 연오 쿠션을 날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너는 언니를 인마! 하며 연오가 쿠션을 주우러 간 사이, 지오의 느닷없는 전투태세에 당황한 아록은 핸드폰을 지오쪽으로 돌려준다.
난 내일밖에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
구진욱이다.
그를 직접 대면했던 것은 거의 5년 전 일이 아닌가. 글자만 읽었을 뿐인데 당시 구진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두개골 안으로 소환되는 매직이 펼쳐진다.
내일.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눈썹을 우글우글 구긴 지오가 아랫 입술을 내민다. 그리곤 기껏 연오가 주워 온 연오의 빨간 분신을 빼앗아 주먹으로 팡. 연오가 자기 뺨을 쥐고 비명을 지른다.
“아! 왜 때려!”
지오가 쿠션을 집어던지며 뒤로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뺨을 쥔 연오가 구시렁거리며 다시 쿠션을 주우러 간 사이, 아록은 메시지를 위로 올려보고는 눈을 크게 뜬다. 지오가 누구랑 문자를 보냈는지 확인한 탓이다.
“구진욱 감독니임?”
“닥쳐.”
“야 너 구진욱이랑 영화 찍어?”
“안 찍어.”
“어쨌든 미팅한단 얘기 아냐 이거?”
“왜왜. 그게 왜. 나 그 감독 이름 들어봤는데. 유명한 감독이면 지오한테 좋은 거 아냐?”
쿠션을 주워온 연오의 물음에, 아록이 인중을 늘이며 웃음을 참는다.
“회사 입장에서야 좋겠지. 근데 구진욱 이 사람이 이지오 옛날,”
지오가 드러누운 채 고개만 들어 아록을 째려본다. 그러자 아록이 말 안하겠다는듯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쉿쉿 시늉을 한다. 지오가 다시 고개를 눕히자마자 아록이 기지개를 쭉 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쎅!”
지오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다시 아록을 째린다. 그러나 아록이 팔을 내리며 나머지 음절을 뱉은 것이 더 빨랐다.
“파하. 어우~ 어깨가 뻐근해가지고.”
둘의 가운데에 서 있던 연오, 2초 정지.
곧 커지는 눈알과 다가오는 유레카의 모먼트. 지오를 향해 번개같이 돌아오는 연오의 고개.
“섹파??????”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지오가 아록 손에 들린 자기 핸드폰을 빼앗아 방으로 쿠당탕 들어간다. 지오의 자취를 보고 멍하니 섰던 연오가 갑자기 진지한 눈으로 아록을 본다.
“아니 근데.”
내 동생 과거 섹파라니 도대체 언 놈이야?! 물을 것만 같다면,
“우리 아까 주문 못하지 않았어?!”
격한 오산이다.
연오의 심각한 물음에 아록이 윙크를 찡긋한다.
“내가 누구야. 해쓰. 이지오 카카오페이 비번 지 생년월일.”
“야 이아록...!”
현재의 족보세트 주문 이슈가 동생의 과거 섹파 이슈를 압살하는 현장에서, 둘은 얼싸안고 서로의 등을 두드린다.
여자 셋이 살고 있는 이 집.
대체로 현재에 충실하며 대체로 속이 평온한 이 세 여자들의 이너 피스는- 곧 깨지고 말 예정이다.
재시작이건 새시작이건 간에,
사랑을 시작하면, 속이 평온할 수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