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인생은 아이의 것
어느 날 유튜브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우리나라 일상을 찍은 동영상이 올라왔다. 유튜브는 마치 내가 무엇에 관심있는지 나보다 더 잘안다. 나이가 들면서 역사에 관심이 생겼다. 영상으로 가끔 옛날을 더듬어 본다. 역사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실제 영상으로 평쳐지니 신기했다. 흰 옷에 갓을 쓴 사람들이 한적하게 오가는 일상이 보였다. 낯선 서양인 사진사와 사진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조선 말기의 사람들이었다. 초가집이 즐비한 거리에 남루한 행색으로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온화했다.
물질문명이 쾌속으로 발전하여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우리의 정신과 행복도 세계 10위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인 지표는 놀랄만치 최하위권을 차지해 놀랍고 속상하다. 국민들은 화가 나있고, 예민해져 있다. 평온하던 조선 사람들의 정서는 지난 100년 사이 왜 이리 황폐해졌을까?
7천 가지가 넘는다는 사람의 표정에는 마음이 담긴다. 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려서부터 무척 알고 싶었다. 오랜 관찰과 대화를 해서인지 아이들의 표정을 보고 아이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이 학원문을 열고 들어오면 표정이 읽혀진다. 어느 날인가 나이에 비해 생각을 잘 표현하는 초등 1학년 호영이가 들어오는데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끼었다.
"호영이는 어떻게 말을 이렇게 예쁘게 잘하니?"
"어어어... 그건 아닐걸요... 선생님이 저를 잘 모르셔서 그래요. 사실은 저 혼자 있을 때 나쁜 욕을 해요......"
"혼자 있을 때 욕을 해?“
"네.
“왜?"
“(손으로 심장을 가리키며) 막 여기가 답답하고 화날 때요."
"어떨 때 답답하고 화나는데?"
"엄마가 계~속 수학 문제를 풀라고 할 때요. 친구들 하고도 못 놀게 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래요. 제가 밖에 나가면 위험하니까 꼭 집안에만 있으래요. 그러면 가슴이 막 답답해요. 그럴 때마다 저 혼자만 아는 상상 친구한테 나쁜 욕을 해요. 그럼 좀 괜찮아지거든요."
"아, 그렇구나...... 뭐라고 욕을 해?"
"(웃음) 어... 그러니깐... 아주 나쁜 욕이에요. 선생님이 아시면 아주 깜짝 놀랄 욕이요."
"...... 자주?"
"거의 매일. 아, 근데 이 얘기는 우리 엄마한텐 비밀이에요."
"당근이지."
아이가 비밀이라면 아이로서는 심각한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미밀 얘기를 하고 싶어하면 긴장된다. 최대한 아이와 눈을 맞추고, 공감하며 경청한다. 호영이가 상상 인형에게 다 풀지 못한 답답함의 찌꺼기를 내게 쏟을 수 있게.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으면 문제가 저절로 정리될 때도 있지 않은가. 고민은 주로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원스럽게 내뱉지 못하고 속에 담아두기 쉽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아이를 혼자 힘으로 키우기는 불가능하다. 학원에 온 아이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면 다른 부모들과 '육아 품앗이'를 한다는 심정으로 최대한 집중한다. 나는 다른 집 아이를 돌보고, 다른 부모가 어딘가에서 우리집 아이들을 도울 것이라 믿었다. 온 세상 부모끼리 어쩌면 텔레파시로 연결되어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의 비밀을 열심히 들으며 아이들의 심리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일은 즐거웠다. 자신의 비밀을 비판 없이 들어주면 나의 말도 아이들은 너그럽게 받아준다. 아이와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쌤과 아이 사이에 라포(친밀한 관계) 형성을 중시하는 편이다.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공부를 해도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는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호영이는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호영아, 너 혼자 집에 있을 때 뭘 하고 싶어?"
"제가 하고 싶은 건요, 음.... 그림 그리기요. 그릴 시간은 없어요."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인데 왜 그림 그릴 시간이 없어?"
"엄마가 낮에 할 숙제를 내주세요. 일 끝나고 집에 오면 밤에 잘 때까지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거든요. 풀면 또 풀라 하고.... 그래서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너~무 하기 싫어서요 몸이 맨날 이렇게 비틀어져요(웃음). 전 수학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요."
"그렇구나. 엄마가 호영이한테 수학을 가르쳐 주셔?"
"아니요. 그냥 제가 풀면 엄마가 답지 보면서 채점 해요."
“아, 그렇구나. 여기 오는 날엔 쉬는 시간에 그림 그리기 하게 해줄까?"
"네!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 칠판에 그려도 되고, 이면지에 그려도 돼. 집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시간을 좀 달라고 쌤이 어머니께도 부탁드려 볼게. 지금 그리고 싶은 거 칠판에 그려 봐."
아이는 공부할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학습을 시키면 일찍부터 공부 정서가 망가진다.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혼나지 않기 위해 하는 척 하기 시작한다. 호영이는 엄마와 소통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엄마는 호영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공부에서 뒤질세라 직장에 다녀와서 쉬지도 못하고 호영이의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하지만 호영이는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모른다. 물어본 적도 이야기를 한 적도 없이 그저 매일 수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문제풀이에 호영이는 가슴이 답답하다. 놀 계획은 없고 매일 똑같은 문제 풀이를 하면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점점 무기력해졌다. 호영이는 친구들과 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조급한 엄마는 아이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우리 학원에는 영어가 걱정되어 보냈지만, 막상 나의 조언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시지 않았다.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누군가 말을 한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 결과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는 훤히 보이는 상황도 엄마에게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등잔 밑이 아주 어둡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선생님, 이건 우리 가족이에요. 엄마, 이모, 아빠, 그리고 이게 저예요."
"하하. 엄마만 왜 이렇게 크게 그렸어. 저 뒤에 아빠는 개미처럼 작네. 호영이는 이모랑도 친한 모양이구나?"
"네, 이모집에 매일 가요. 이모집엔 책이 많거든요."
"아, 이제 알겠다. 호영이가 책을 많이 읽어서 이렇게 말을 잘하는거였구나...... 이젠 쌤이랑 영어 독서도 하니까, 앞으로 호영이는 영어도 편하게 잘하게 될 거야."
"네...... 선생님, 그림 하나 또 그렸어요.“
“옆에 있는 여자 아이는 누구야?”
“얘는요 제가 좋아하는 여자애예요. 우리 반 애."
"여자 친구는 엄청 크게 그리고 호영이는 아주 작네. 여자 친구 예뻐?"
"네. 흐흐흐. 이것도 우리 엄마한텐 비밀이에요."
"그래. 알았어."
호영이 아빠는 몸이 불편하셔서 엄마가 주로 일을 하신다. 엄마는 일하는 동안 아이의 안전이 걱정이다. 그래서 아이가 밖에 나가지 않으면 마음이 놓인다. 낮동안에 핳 숙제를 내준다. 그 시간에 다른 집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열심히 할텐데 그러지 못하는 엄마 마음은 답답했다. 늘 아이 공부가 걱정된다. 외롭고 심심한 어린 아들의 마음을 엄마는 고려하지 못했다. 이렇게 아이 마음을 모르고 매일 시키는 공부는 과연 얼마만큼 효과를 나타낼 수 있을까? 엄마가 얼마나 애를 쓰는 지는 말을 안해도 알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 공부란 이미 최대한 피하고 싶은 고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을 사지 않은 어떤 활동이든 초등 저학년까지 늦어도 초등 고학년까지는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사춘기를 넘어가면 아이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 속에서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은 일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그 몇 년 후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지금 현재의 아이 마음도 걱정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도 모르게 상상인형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아이의 마음에 엄마는 관심이 없었다. 몇 번인가 마음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려봤는데도 변화는 없었다. 아이 정서에 대한 엄마의 무관심은 아이의 마음을 점점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본래 놀고 싶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짬짬이 놀이를 찾는다고 한다. 또래 친구들과 노는 일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집에서, 운동장에서, 자연 속에서 참견 받지 않고 놀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안전하게 하는 것은 어른의 역할이지만 어떻게든 아이가 놀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고 세상을 관찰하고 관계를 배운다. 아이들의 놀이를 무시한 그 어떤 거창한 목표도 장기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성공하더라도 뒤에 아쉬움과 그림자를 남긴다.
호영이 엄마에게 수학은 가능한 많은 문제를 푸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호영이는 혼자서 생각을 하며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아이였다. 수학은 사고력을 키우는 학문이므로 문제를 푸는 대신 대화가 필요했다.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수학과 관련된 어린이 수학 도서를 읽었다면 수학에 대한 좋은 선입견을 가졌을 것이다. 호영이는 반복되는 수학 문제 풀이에 지쳐버렸다. 그 결과 초등 1학년에 수학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들의 공부 지도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인 부모에게 이미 경험한 부모들이 쓴 자녀교육서를 읽기를 권유하고 싶다. 특히 공부의 기술을 알려주는 내용보다 먼저 아이들의 공부 정서가 어떻게 해야 자발적이고 즐거운 쪽으로 흐르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공부할 시간이 길고,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진짜 공부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공부법을 검색하면 좋은 방법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내 아이에게 맞는 방법만이 좋은 공부법이다. 아이에 대한 관찰이나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부모의 방식을 지속하는 것은 아이가 공부를 싫어하는 지름길이다. 음식을 억지로 먹으면 체하듯, 내적 동기가 생기지 않은 채 주입식 반복 학습은 공부를 시작부터 지겨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엄마 주도 학습의 실패 사례
부모 세대는 바쁜 것을 미덕으로 삼던 시대를 살았다. 일과 일 사이에 쉬는 시간 없이 많이 움직이면 능력이 있어보였다. 열심히 사는 것은 늘 칭찬을 받았다. 잘 때와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부지런함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아이들이 정해진 활동을 머뭇거림없이 척척 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의식주가 걱정 되어 각자 살 궁리를 해야 하던 우리 세대와 환경이 다르다. 이미 태어나보니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결핍이 없는 세상에서 삶의 목표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쪽으로 흐른다. 먹지 못하거나 살 공간이 없거나 입을 옷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재미를 찾는다. 무서운 권위에 복종하는 대신 타고난 각자 타고난 성향에 맞춰 살아도 되는 권리가 주어진다. 부모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지만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대부분 모른다.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급한 마음에 시키고 혼내서 하는 공부에는 영혼이 깃들지 않는다. 꾸중을 피하기 위한 눈치가 작동할 뿐이다. 설령 아주 어린 나이거나 자신의 주관이 싹트기 전인 사춘기 이전이라면 투덜거리면서도 영혼 없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춘기가 오면 이 모든 강요는 뿌리부터 거부당한다. 인간의 자율성이나 내적 동기가 존중되지 않은 채 지속된 공부는 강제 노동과 다른 바가 없다. 아이들은 활기를 잃는다. 그것은 아이들의 눈동자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신과 정서에 관심을 두는 습관이 없는 부모에게는 아이들의 표정은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직 부모가 정한 목표와 과정에 집중하면서 사나워진 아이들의 정서와 부모의 권위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나라에서 청소년들의 사춘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고 사춘기의 건강한 가족관계를 위한 학부모 교육을 미리 시켜주었다면 이렇게 많은 가정에서 사랑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힘겨운 말싸움을 예방할 수 있을텐데.... 그런 사회 인식이 아직 되지 않은 세상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빨리 와 버린 물질적인 풍요 위에 풍요로운 정서에 대한 준비는 아직도 멀리 있었다.
아이들을 교습소 안팎에서 만나면서 먹을 것은 풍부하나 정신이 피폐해진 그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긴 했으나 일대일의 행위였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너무 많은 시간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공교육과 사교육 양자의 공부 강요를 빨리 나라에서 바로 잡아 주기를 무척이나 기다렸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 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들도 국민들은 환한 웃음으로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으나, 우리 나라는 국민들의 수준보다 낮은 교육 시스템으로 국민 모두가 교육이라는 족쇄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고 당하는 아이들의 공부 노동도 가엾었지만, 자신의 인생 한가운데를 다 바쳐 아이들을 더 잘 키우려는 부모의 노력이 자꾸만 헛된 노력이 되는 광경을 보며 교육 시스템을 무수히 원망하고 원망했었다.
엄마주도 수동학습의 슬픔
"선생님, 우리 영재가 K대 xxx 학과에 합격했어요."
"우와, 영재 어머니, 축하드려요! 아드님이 명문대에 합격하다니 그간 어머니가 고생하신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선생님...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영재가 대학을 안 가겠다고 난리예요. xxx학과는 자기가 원하는 학과도 아니지 않냐고요... 어디든 합겹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아이하고 상의하지 않고 원서를 넣었거든요. 주변 사람들은 명문대 합격했다고 모두 축하해주는데 애랑 말이 통하지 않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아이들과 갈등이 많은 부모님들을 위한 상담 봉사를 계속해왔다. 지인이 연결해준 영재 어머니는 아들의 거의 모든 활동과 공부를 대신 정해주셨다. 아들은 웹소설 작가가 되고 싶었다. 혼자서 습작도 하고 공모전에도 참가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 길로 돈을 벌 수 없을 것 같아 아들의 생각을 바꾸려고 많은 노력을 들였다. 엄마는 아이가 수학 과학을 잘하니 이공계 학과를 진학시키면 직장도 수월하게 얻을 수 있고 아이도 철이 들면서 공부를 할 것이라고 믿고 영재가 전공하고 싶다는 학과에 지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재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는 대화와 의사결정에 아이는 의지력을 잃어갔다. 아이는 점점 더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 아들이 갈 학교와 학교를 일일이 학원가에서 찾고, 학교 활동도 엄마가 찾아서 대신 결정해 주었다. 아이에게 학원만 다녀주면 원하는 컴퓨터 게임을 충분히 할 수 있게 해주며 공부를 이어갔다. 수학, 과학 과목에 재능이 있었던 아들은 공부가 싫었지만, 학원을 가는 조건으로 놀이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놀기도 하면서 의무적으로 학원을 다녀왔다. 엄마의 계획을 짜는 일도 힘이 들었지만, 그것을 아들의 몸을 통해 아바타처럼 실행시키느라 엄마는 늘 바쁘고 피곤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엄마는 있는 힘과 영혼까지 다 끌어모아 아들이 대학에 가는데 필요한 스펙과 조건을 갖추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아이는 영혼 없는 시계추처럼 학교를 오갔다. 아빠는 입시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입시에 대한 조언을 일절 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빠의 무관심'을 실현하기 위해 남편도 힘들고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빠는 무관심을 실천 중이었다.
영재는 취업이 잘된다는 K대 인기학과에 수시 전형으로 합격했다. 엄마는 뛸 듯이 기뻤다. 지금까지의 노고를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뒷바라지를 했던 노고를 인정받았다.
아들은 합격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전공이라는 것이었다. 차라리 군대를 가겠다고 말했다. 엄마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나는 지금이라도 아들의 의견대로 군대에 보내고 제대 후에 아이가 원하면 공부를 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영재 엄마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아들에게 재수를 시켜 의대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아들 정도의 실력으로 주변에 의대를 간 아이들이 많다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구속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들의 마음처럼 나도 답답했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엄마의 행동은 그 시작이 비록 아들 사랑이었을지라도 아들에겐 아주 무시무시한 심리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
전공적합성의 모순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에서는 전공 적합성을 중요한다. 아이가 전공하고자 하는 학과를 일찍 정할수록 입시에는 확실히 유리하다. 지원 학과와 관련한 확고한 의지와 활동이 생기부를 통해 증명되면 평가하는 입학사정관의 입장에서는 학과 충성도가 더 크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학종은 드러난 수치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성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아이마다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는 성향은 다르다. 자신의 꿈이나 진로, 목표를 적극적으로 정하는 아이라면 학종 수시 전형에서 전공을 뚜렷하게 정하고 이 방향으로 준비하는 에너지가 많기 때문에 생활기록부에 그러한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다각도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에 따라서는 계획이나 목표 정하는 일을 어려워 하는 성향도 있다. 그럴 경우 방향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시때때로 어느 활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정하는 일은 부모의 일이 되기 쉽다.
어린 아이들에게 순수한 경험과 즐거움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허둥지둥 헤맬 여지가 있다. 자신의 마음이나 타고난 성향을 발견할 충분한 시간이 부족하다. 또 아이들의 꿈은 시간이 갈수록 변해간다는 점을 간과하고 우선 방향을 정하는 것이 유리한 환경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어진 활동을 전략없이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입학사정관들은 학생이 진로를 도중에 얼마든지 바꿔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공적합성보다는 계열적합성 정도를 갖출 것과 원하는 전공이 바뀌게 된 계기를 자기소개서나 활동이나 면접에서 강하게 어필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학사정관의 입장에서는 성적이 비슷한 아이 둘이 있을 때 해당 학과 활동에 더 열정과 관심이 많은 지원자에게 더 좋은 평가를 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즉, 아이가 원하는 학과와 직종이 일찍 정해지면 유리한 것은 맞다. 가고 싶은 학과가 중간에 바뀌더라도 대학 합격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길들여 온 활동과, 생활기록부 기록을 변경하지 않는 것이 변경하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입시 정보를 포괄적으로 인식하기 어렵다. 무척 복잡한 입시 제도인데다 거의 매년 손을 보는 형식이어서 심지어 학교 교사들도 비슷비슷하게 변경되는 용어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전업적으로 아이들만 돌보는 부모도 내 아이에게 맞는 정보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다. 당연히 컨설팅이라는 이름으로 내 아이를 위한 교육 정보는 시중에서 매매된다.
교육 컨설팅은 불안하고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막연하고 두려운 부모들에게 정보와 문제의 솔루션을 제공한다. 그 솔루션에 맞추어 학원에서는 수업을 판매한다. 정보가 없는 부모는 학원의 솔루션에 매달리게 된다. 스스로 방향을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재수 삼수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강조하던 전공적합성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합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쪽으로 컨설팅이 제공되기도 한다. 확신 없이 지루한 입시를 1,2년 연장하는 것의 고통을 피하고 싶다. 또, 재수를 하더라도 재수 실패시 돌아갈 안전지대를 만들어 두어야 편안하기 때문에 이름만 걸쳐둘 대학에 합격을 시키기 위한 고3 때의 컨설팅도 인기다.
합격에 집중하다보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아, 이 전공이 내 길이 아닌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 합격 이후 학과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대학에 일단 합격하고 나서 이듬해 다시 한번 한 학기를 쉬면서 '반수'를 하는 경우가 많다. 또, 일단 합격하고 나서 복수전공으로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라는 조언도 통한다. 일 년 열심히 학점 따서 원하는 학과로 전과나 더 나은 대학으로 편입을 하라는 등의 컨설팅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급하고 복잡한 입시 제도는 우물에서 숭늉을 찾듯이 숙고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많은 결정을 강요하고 부모 주도의 아이 학습을 강요한다. 모든 아이들이 놀면서 천천히 자신의 마음과 성향을 알아가는 과정을 충분히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할 시간 없이 이미 경쟁 체제로 정해진 학원 수업과 의무 공교육을 오가느라 놀이는 간데 없고 피곤이 겹겹이 쌓인 아이들만 늘어날 뿐이다. 예전 우리가 학창시절이던 때에는 학원 없이 점수 줄서기였다면, 지금은 모두가 학교와 학원을 밤낮없이 일주일 내내 바쁘게 오가면서 점수로 줄서기를 하고 있다. 동일한 줄서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 세대가 더 행복하다. 왜? 쉴 시간이 있었고, 친구들과 놀고 대화할 시간은 있었으니까.
스스로 선택한 일이어야 진정한 동기가 생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어야 열정이 생긴다. 빨리 결정할수록 유리할 수 있는 교육이기에 아이들을 대신해 부모가 결정한 코스를 아이들이 수동적으로 따라가고 있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의 선택권을 수없이 빼앗게 된다. 놀이 시간이 극도로 줄어든 아이들은 즐겁지가 않다. 즐거웠던 아이들도 지친다. 다단계로 계층화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지친다. 더 잘하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아이들도 긴장하고 살긴 마찬가지다. 모든 아이들은 자신답게 살아볼 권리를 잃는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의지를 가지는 패턴을 허락하지 않는 바쁜 아이들의 생활이 많은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최상위층의 아이들은 행복한걸까. 지난 20여년간 관찰한 바로 최상위 아이들은 순위 경쟁에서 앞서 있기 때문에 인정받는 만족감은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기 보다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조건 이겨야한다는 경쟁심으로 살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은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엄마, 재가 살아온 20년을 뒤돌아보면 공부했던 기억밖에 없어요.”공부를 최상위로 잘하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승자인 것 같은 아이들에게도 여유없고 즐기기 어려운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승자 없는 무한 경쟁을 어떤 식으로 끊어내야 할 것인지 늘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