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공부 잘하길 요구한다
민재는 조용하지만 예민한 중1이었다. 같이 대화를 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감수성이 좋은 아이였다. 평소 민재의 목과 얼굴에는 아토피가 피었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엄마와 아빠가 다툰 날, 민재가 아빠에게 꾸중을 들은 날에는 특히나 얼굴 아토피는 더욱 심해졌다. 아토피도 심리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시험기간이 되면 민재는 손으로 얼굴을 긁어 아토피 증상이 도드라져 보였다.
시험 준비 기간에 아빠에게 혼나는 일이 잦았다. 매를 맞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얼굴이 며칠간 세수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얘졌다. 정서가 불안한 날엔 다른 날보다 더 집중하지 못했다. 멍하니 먼산을 바라보거나, 책을 쳐다보며 다른 생각에 골돌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하고, 아빠가 요구하는 점수가 나오지 못할 것을 염려하느라 책 내요은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우선 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툼이 잦은 부부는 아이가 공부할 수 없게 하는 요소를 제공하는 꼴이된다. 그렇지만 아이의 시험 결과가 좋기를 바라는 앞뒤가 맞지 않는 환경을 제공한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길어져도 능률은 오르지 않으니 결과가 나쁠 것을 걱정하느라 아이 마음은 초조하다. 평소에도 아빠에게 언제 혼날지 몰라 초조한데, 시험기간이 되면 불안이 고조되어 산만해지고 공부하기 어려운 정서상태가 된다.
민재는 욱하는 아빠와 주눅 든 엄마 사이에서 늘 우울했다. 부부 싸움을 하다가는 갑작스레 불똥이 자신과 동생에게 튀곤했다. 부부 사이는 갈수록 재미를 잃어갔고 대화가 없는 부부의 관심은 아이들의 공부라는 공통 관심사로 모아졌다. 부부는 갈라서고 싶지만 ‘자식 때문에 산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사춘기에 들어선 민재는 다른 가족처럼 화목하지 못한 부모님 아래서 남모를 아픔을 겪고 있었다. 가족 분위기는 마치 일기예보처럼 아이들의 표정에 투영된다. 감정은 주변인에게 쉽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민재, 너! 아빠가 하라는 대로 공부하랬지? 왜 아빠 말 안 들어? 어? 아빠 어릴 때는 말이야, 학원 같은 거 하나도 없어도 다 혼자 공부했어. 니들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집 걱정을 하니, 먹을 거 걱정을 하니. 아빠가 벌어서 학원도 다 보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공부를 안 하냐고? 이번 시험 결과에서 떨어지면 맞을 줄 알아. 알았어?”
아이의 공부 정서가 파괴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꾸중을 지속적으로 들은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열망보다 먼저 슬픔을 느낀다.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가 되려면 최소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는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부모가 요구하는 행동을 척척 해내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수십년을 더 살아온 엄마 아빠는 아이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지만 어린 아이에게는 모범을 요구한다. 당연히 공부는 잘하기 어렵고 아이들은 두렵거나 분노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우울해진다.
아빠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너무나 싫었던 가난에서 벗어나는 데 온 정성을 집중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난하지 않은 환경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가난 대신 불안을 심어줬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의식주가 해결된 사람은 안정을 찾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그래서 먹고 살만한 부유한 사회가 되면 다음으로 정서가 안정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행복의 수준은 달라진다. 아빠는 두 아들에게 부족함이 없는 공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착각하고, 자신의 허물을 깨닫기 어렵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아빠의 바람과는 반대로, 잔소리와 꾸중을 많이 들을수록 아이들은 공부가 지겨워 공부에서 멀어진다. 민재는 집에 있으면 늘 불안했다. 아빠에게 혼나는 날은 버려진 것 같은 우울함이 들었다. 친구들과 PC방을 몰려다니며 놀았다. 그런 순간에는 재미도 있었고 사랑의 허기가 보충되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 도표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사람의 욕구는 5 단계로 이루어진다. 아래 단계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 욕구를 추구하려 한다. 가장 아래 욕구는 생리적인 것이다. 즉, 의식주와 수면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들이다. 민재의 부모는 민재에게 이 단계의 욕구를 잘 충족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민재는 그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소속된 요즘에 우리 나라 아이들은 대체로 가장 아래 단계의 욕구를 태어나면서 잘 충족하며 살게 된다. 못 먹거나 살 곳이 없어서 힘든 아이는 뉴스에 나올 정도로 흔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들은 태어나보니 저절로 먹고 입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 단계인 안전 욕구가 중요해진다. 부모가 따뜻한 사랑을 주며 편안한 가족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면 아이들은 행복감을 느끼며 다음 단계의 욕구인 애정 소속감의 욕구를 저절로 충족하려 할 것이다.
민재와 동생은 집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빠는 잦은 부부 싸움으로 불안한 분위기를 만들었으면서도 시험 점수를 탓하며 꾸중까지 했다. 아빠가 아이들이 공부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장기간 처한 아이는 공부에 흥미를 잃고 공부에서 손을 놓게 된다. 민재는 늘 오늘은 아빠에게 혼나지 않을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자꾸 꾸중을 받다보니 가족에게 애정과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자기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친구들과 집밖으로 나가 놀고 싶었다. 놀 때는 좋았지만 또 집에 들어가려면 불안함에 떨었다. 다시 꾸중을 듣고 또 밖에서 친구들과 스트레스를 푸는 순환 구조 속에서 살고 있었다.
누구나 초보인 부모도 배워야 달라진다
민재 엄마는 민재를 편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을까? 무서운 아빠 때문에 힘들어도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는다면 충분히 학교 생활과 학습을 열심히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질 수 있다. 아빠의 퇴근이 집안에 불안감을 만들지만 힘든 엄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강한 학습욕구를 갖기도 한다.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인정 받고 싶은 욕구다. 나를 아껴주는 엄마가 권장하는 공부를 잘하고 싶어진다. 공부를 잘해서 엄마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서 행복할 수도 있다. 칭찬과 인정을 받으며 아이는 자존감도 높아지고, 무서운 아빠를 가까이 하기는 어렵지만 아빠의 인정을 받기라도 하면 꾸준히 공부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다른 삶의 즐거움을 아이가 쉴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는 친구였다. 친구들과 게임을 하면서 소속감의 욕구를 충족하고 있었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소속감. 친구들과 함께 시작한 게임의 세계도 에티켓과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아이 혼자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다.
부모는 모두 게임과 친구들을 비난했다. 민재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할수록 부모에 반항감이 들었고 게임은 재밌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얼마나 재밌는지 시간 조절이 안된다고 했다. 게임방에 들어갈 때는 신이났고, 끝나고 나올 때는 겁이났다. 게임방에 들렀다 수업시간에 맞춰 들어온 민재의 얼굴에 아토피는 심했다. 게임을 한 것이 또 들통나서 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한심하다고 책망하기도 했다.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 먹지만 친구가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하면 물리치지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초등 5학년인 동생조차도 이젠 자기처럼 부모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면서 동생을 걱정했다.
어머니와 아이들 정서의 중요성을 몇 차례 상담했다. 어머니는 우울하고 주눅 든 상태이긴 했지만 아이들을 두렵게 하는 분은 아이었으므로 아이들이 마음 잡고 공부하게 하려면 아빠의 태도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렵사리 민재 아빠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대체로 아이들 공부를 책임지는 분은 엄마인 경우가 많아서 나는 주로 엄마와 상담한다. 간혼 민재네 집처럼 아빠가 전체 분위기를 좌우할 경우에는 엄마와의 지속적인 상담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긴 어렵다. 민재 아빠와의 면담에서는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드렸다. 아빠는 아이들이 그렇게나 힘들거나 무서워하는 줄을 전혀 몰랐다며 마음 아파하셨다.
"선생님,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민재 아버님은 아이들 공부에 개입을 안 하시는 게 아이들 정서에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공부보다는 관계나 정서가 안정되어야 공부도 가능하니까요. 지금 이대로라면 공부는 당연히 잘할 수 없고, 즐겁지도 않아요, 아빠를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것도 어렵구요. 우선 욕심을 내려놓으시고 집에 계시는 시간엔 아이들과 몸으로 노는 일을 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걸 아버님의 숙제로 드릴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공부에 대한 관심은 민재 어머니가 담당하는 것으로 해서 아이들이 집에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해보겠습니다. 엄마 아빠가 전과는 다르게 다정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바깥에 나가기보다 집에 있고 싶어할 거예요. 그 분위기에서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공부 태도를 서서히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숙제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할 일이 또 있으면 꼭 알려주십시오."
생산성에 집중되는 회사 생활이 오래되면서 일을 하시는 엄마와 아빠는 감성보다는 사무적인 지시와 결과에 더 관심을 갖기 쉽다. 살을 부비고 눈을 쳐다보면서 공감하는 일,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가족의 최우선 역할이라는 것을 잊어가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나서 주말에라도 가족의 따뜻함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교감이 있은 후에 아이들에게 공부의 중요성과 효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이들이 공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순서이다.
민재 아빠와의 상담이 있은 뒤 아빠는 약속대로 잔소리를 멈췄다. 민재가 아빠의 언어적 신체적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징표는 곧바로 얼굴에 나타났다. 민재 얼굴의 아토피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선생님 우리 아빠에게 뭐라고 하신 거예요. 예전의 아빠가 아니에요. 엄마한테도 엄청 잘하시고요. 주말에 아빠랑 동생이랑 저랑 싸우나 갔거든요 공부 얘기도 안하시고 잔소리도 하나도 안하시고 엄청 친절해요. 칭찬도 해주세요. 완전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신기해요."
"그래? 너무 잘됐다."
불안감이 사라지고 칭찬을 받는 민재의 표정은 무척 밝아졌다. 자주 웃고 농담도 하고 수업도 훨씬 열심히 해보려고 했다. 자녀의 모든문제 행동이 부모 탓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자녀 행동의 원인의 큰 부분은 부모의 말과 행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이상 행동을 하는 유전적 기질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 이상 행동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도 부모가 만들어 주는 양육환경이다.
엄마가 아이들 공부와 관련된 모든 결정권을 갖게 되면서 민재는 게임을 줄이고 공부 의지를 되찾게 되었다. 조금 더 타이트한 관리를 하는 큰 학원으로 옮겨 자신의 공부 태도를 바꾸고 싶어했다. 민재의 성실성을 늘려줄 수 있는 다른 학원으로 이동하길 나도 적극 동의했다.
"선생님, 여기서 영어책 읽는 거 재밌었어요. 앞으로 커서도 기억날 거 같아요. 영어책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어요. 말 안 듣는 저를 이뻐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학원 옮겨야 여기서 매일 같이 놀던 친구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게임도 끊을 수 있고요......“
아빠와 관계가 호전되면서 민재는 공부를 해보고자 하는 의욕을 드러냈다. 마음이 편안해야 공부가 잘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면 가장 먼저 부모가 정답고 사이좋게 사는 일이 먼저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 세대와는 달리 태어났더니 의식주가 갖춰져 있었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먹고, 자고, 입는 일이 걱정인 부모를 위해 스스로 먹을 거리와 잘 곳과 입을 옷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부모가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고, 부부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면 아이는 행복감을 느낀다. 반면, 아무리 크고 좋은 집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자주 다투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불안해진다. 불안한 아이는 이차적으로 여러 가지 심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 아이들에게는 공부를 잘하라고 해도 집중할 수 없다.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지 공부를 통해 성취를 하고 싶은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싸우는 부부도 아이들에게 만큼은 학생의 본문인 공부를 잘해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주기를 바란다. 성인인 부모는 아이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할 일을 척척 잘해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