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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Jan 10. 2024

발각

Ep.2 비가 기다려지는 소녀


" 답장 기다릴게.”


파르스름하고 얇은 손가락으로 편지를 건네준 영배는 타박타박 교실로 들어갔다,

그 발자국 소리에도 정희는 가슴이 툭툭 뛰었다. 누가 보고 있지는 않은지 주위도 한번 둘러보게 되고 죄를 지은 거 마냥 심장이 덜컥거렸다. 봉투가 찢기지 않게 살살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장미가 입체적으로 도드라진 하얀 편지지에 타자기로 쓴 것처럼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쓴 글씨가 정갈했다.

'글씨도 어쩜 이렇게 곱냐...'

라고 중얼거리며 읽어내려간다.


“정희라고 불러도 되지? 동생이니까 그렇게 부를게. 네가 입학식 날 선서를 할 때부터 너만 보이더라(중략). 그날 팻말을 만들어주고 너와 대화를 한 뒤로 네가 자꾸 신경이 쓰이더라고.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알은체를 할까도... 학년이 다르니 보기도 어렵더라. 비 오는 날엔 네가 집으로 가는 과수원 길을  혹시 지나가나 가끔 교실 창밖으로 내다보기도 하고 말이야.(생략) 앞으로도 도움이 되고 고등학교 가려면 열심히 공부도 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좋은 관계가 되면 좋겠다. 내가 여동생이 없으니 여동생이 되어주면 어떨까?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정희는 남학생에게 처음 받아본 편지에 볕에 널은 콩대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동생은 무슨 여동생, 나는 여동생 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오빠가 벌써 맘속에 들어왔거든요~~^^'

편지를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며 양철지붕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길은 학교가 일찍 파하는 날  신작로로 가는 길보다 지름길이라 정희가 자주 다니는 길이다. 과수원과 농가 몇 채만 있어서 한적하고 밭에서 일하시는 농부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만 드문드문 보이는데 차 경적이 울리지 않아 고요해서 좋았다. 길가 풀숲에 나 보란 듯 모여 피어 있는 쑥부쟁이, 풀줄기를 꺾어 나온 노란 진물로 손톱에 바르기도 하는 애기똥풀, 머리가 무거워 힘든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보랏빛털보할미꽃, 하얀 씀바귀가 가득 핀 들판이 정희를 반겨주는 듯하는 시골길이 정희는 좋았다.








오늘따라 그 길에 피어있는 꽃들이 더 하늘거리고 별같이 아름답게 보였다. 

과수원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왼쪽엔 은색 양철 지붕집이 나오는데 두어 개의 오래된 자두나무가 대문옆에 우뚝 서있어 자두가 열릴 즈음이면 가지가 늘어져 부러질 만큼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인기척이 없는 외딴집이어서 그런지 자두는 시들어 꼬부라질 때까지 달려있다가 어느 날 보면 누군가의 손을 탔는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어른들 키 높이에 열려 있는 자두라 소녀는 그림의 떡처럼 입맛만 다셔야 했다.


정희친구들은 정희가 그 길로 집으로 가는 걸 알고 늘 겁을 주고 놀렸다.

 "그 양철집 말이야 밤에 귀신이 나온다는데 그래서 밤엔 잘 그 길로 안 다닌다~" 그 얘기에 정희는 진짜 그 집에 사람이 안 살아서 그런 소문이 돈 건지 아니면 누군가 귀신을 본 사람이 있는지 소녀는 늘 궁금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정희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솔길 끝자락에 뽕밭 있다. 엄지손가락만 진보랏빛 뽕열매가 주절주절이 달려있다. 소녀에게는 시골에서의 모든 풍경이 진기한 것 들뿐이어서 하교시간을 늘 몇십 분씩 지체하게 만들었다. 손가락만 한 오디를 몇 개 따서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간 날은 입이 숯검덩이가 되어 붓으로 보랏빛색을 잔뜩 칠해 놓은 아이가 되기도 했다. 처음엔 거울을 보고 기겁을 했다.


더구나 정희가 그 길을 좋아한 이유는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종달새의 지저귐이었다. 곡조가 있는 소리를 되풀이해서 우는 아이는 아마도 수놈일 것이다. 삐삐빅 삐빅삐~ 암놈한테 구애를 하는 그 소리는 오선지에 음표로 만들 만큼 소녀 귀에 못이 박혔다.

"오늘은 너희들의 노랫소리가 천사들의 노래 같구나!"





선배의 프러포즈에 편지를 받은 정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쁜 편지지에 답장을 쓴다.


서두는 To. 선배님이었다.

그런데 선배님이라고 쓰다 보니 조금은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오빠는 조금 징그러웠다.

아~~~   Red Rose라고 불러야겠다.

영배가 체육대회 때 입었던 붉은색 티셔츠가 하얀 얼굴에 잘 어울려서 장미의 붉은색을 떠올렸다.

 "선배가 수업 마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때 저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어 반가워요. 앞으로 잘 지내요."


정희도 이런 편지를 처음 써보는 거라 서투르고 유치하게 생각이 들었지만 진심을 담아 꼭꼭 눌러 한자씩 쓰다 보니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사랑은 유치한 거래잖아!~'


 이 편지를 어떻게 전해줄까 하다가 선배와 같은 동네에 사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1년 후배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그렇게 연서릴레이는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계속되었다. 몇 번 그렇게 후배에게 우체부 역할을 시키다 보니 좀 불편하기도 해서  아침에 각반 반장이 출석부를 교무실에서 가져다가 교실에 가져다 놓아야 했는데 수업 전에 선배에게 줄 편지가 있을 때는 선배 반 출석부 뒷칸에 꽂아놨고 선배는 소녀에게 줄 편지가 있으면 정희네 반 출석부에 꽂아 두고 수시로 교무실을 드나들며 우체부 없이 전달하기까지 이르렀다.


 

 둘이 한 학교에 다닌다 해서 매일 얼굴을 마주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학년이 다르고 교실 층수가 다르기에 어쩌다 멀리서라도 얼굴이 보이면 반갑게 잘 있구나 하며 웃어주는 것 그것이 다였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면 신기하게도 어디선가 꼭 한 번은 보게 되는 것을 정희는 이후 알게 되었다. 그날도 하굣길에 가랑비가  내렸다. 가을비였다. 선배가 학교 뒤 개구멍 쪽으로 향한 양철지붕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짬을 내서 나온 것 같았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주고 싶은 책이 있어서 ,,,"

하며 헤르만헤세의 '수레바퀴밑에서'라는 책을 건넸다.

잠시 서서 우산 속 데이트를 하며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다 읽고 감상문 써서 주는 거 잊지 말고~"

선배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빗속으로 우산도 없이 걸어갔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선배의 모습도 왠지 우수에 찬 듯 멋졌다.

그날 이후로 비가 오면 오늘도 선배가 있으려나 하는 기대감으로 그 길을 들어서기도 했고 어디선가 지켜보고 나의 하굣길을 지켜주려나 하는 맘이 들어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주위에 밭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희를 따라다니면서 왠지 겁나게 하는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몇 있어서 해가 있을 때만  다니는 길이다.

그날 이후로 정희는 비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비 오는 날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이들의 모습을 주시하여 보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보름쯤 시간이 흘렀을까?  학교를 가려고 나서는 정희에게  정희 엄마는

"이번주 토요일 집으로 오라해라, 누군지 알지?"

하는 평소와 다른 건조한 말투에

 정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어쩌지 엄마가 영배선배를 혼내면 어쩌지?' 하며

혼자 맘을 졸이며 하루를 보냈고 며칠 뒤 선배에게 엄마의 말씀도 편지로 다소 급하게 전했다.


엄마는 어떻게 아셨을까?




다음 주에 또 만나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과 좋아요는 달래를 춤추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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