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배는 담임선생님한테 상담실로 끌려가 이유도 모르고 맞아야만 했다. 사정없이 분풀이를 하듯 서너 대를 때리고 나서
"왜 맞는지 알지?"
"아뇨."
"뭘 잘 못했는지 생각해 봐!"
"모르겠습니다."
"너 2학년 정희랑 사귀지? 만나지 마라. 아직 공부할 때고 몇 달 후면 고등학교 시험이 있는데 중요한 시기에 정신을 딴 데 팔면 되겠나? 어린것들이 연애질이나 하고 내 말 명심해라."
그제야 영배는 선생님의 훈육이 이유가 있는 걸 알았지만 이게 맞을 일인가 싶었다.
영배는 맞은 엉덩이 피부가 터질 것 같이 아팠기 때문에 걸을 때마다 뻐근함을 참아야 했다. 맞은 아픔보다 마음이 더 쓰라렸다. 상담실에서 나온 영배는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게 맞을 일이냐고? 우리가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사춘기였던 영배도 자기를 저지시키는 선생님이 원망스러웠고 반항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희와 영배의 집은 같은 마을이 아니라 둘이 따로 만나거나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렇게 소문이 날 것도 아니었다.
중3이라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10시까지 야간 학습을 해서 방과 후에는 얼굴을 볼 수도 없고 그저 마음이 가득 담은 편지를 주고받는 그게 그들의 유일한 데이트였다.
더구나 정희 엄마는 딸에게 이번 토요일에 선배를 데리고 오라고 말을 던지셨다. 선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엄마와 마주치는 순간을 상상만 해도 몸서리칠 일인데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희 엄마의 엄마, 정희의 증조할머니 되시는 분은 동네에서 엄하기로 소문난 할머니였다. 정희의 외가는 함흥이고 1.4 후퇴 때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내려오신 실향민이었다. 딸들에게 만나달라고담밖에서 기웃거리고 얼씬대는 남학생들이 나타나는 낌새가 보이는 날이면 양동이에 물을 하나 가득 받아서 담너머로 냅따 물세례를 해 다시는 오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순진한 어린 딸들이 남자들에게 꼬임을 당할 까봐 애초 싹부터 잘라버리는 분이셨다. 그 밑에서 자란 정희의 엄마 또한 말랑말랑한 분이 아님을 정희는 잘 알고 있다. 생활력과 당참까지 할머니한테 고스란히 전수받은 터였다. 오죽했으면 할머니 별명이 호랑이할머니이실까?
정희가 4,5살 즈음에 황금거북선 저금통의 아랫배를 일자로 면도날로 살짝 자르고 10원짜리, 운 좋으면 50원짜리 동전을 잡히는 대로 꺼내어 구멍가게에서 풍선껌이랑 뽑기 같은 걸 사 먹고 들통날까 봐 투명테이프로 붙여놓은 사실을 아시고 그 작당을 한 정희의 오빠와 함께 옷을 탈탈 벗긴 체 집밖으로 쫓김을 당한 일이 있다. 엄동설한에 오누이는 덜덜 떨며 잘못했다고 빌어도 십 분 이상 그들의 목소리는 마을 담장너머로 메아리칠 뿐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 둘은 동네사람들의 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었다.
정희의 엄마도 대나무처럼 곧은 분이어서 호적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딸이 남자를 사귄다는 거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게다.
이제는 정희엄마가 아셨으니 더 이상 숨길 수도 없다.
아마도 정희가 학업성적이 떨어져 반에서 1등 자리도 놓치고 전교 순위가 14등으로 밀려나자 정희엄마는 딸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아셨던 것 같다. 엄마보다 딸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니면 체육선생님이셨을까? 학생수가 300명도 되지 않은 적은 수여서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선생님들은 전해서 듣기도 하셨으니 정희 엄마 귀에 들어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정희엄마는 딸의 가방을 열어 편지를 혹시 읽으셨던 걸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는 정희였다. 아빠라도 이사실을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한 일이다. 엄마보다 아빠는 더 무서운 분이셨다.
정희엄마는 방문객에게 다과를 내놓으며 조용조용히 말씀을 하셨고 정희는 우물곁에 매어있는 순돌이의 집을 발로 톡톡 건드리며 조마조마 떨고 있다. 그 시간이 왜 그리 더디 가는 건지... 드디어 인기척이 들렸고 정희 엄마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로 인사를 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정희엄마는 그들을 무식하게 대하진 않았다. 서울서 대학물을 먹어서가 아니라 외할머니한테 고스란히 배워 온 엄마라 사춘기 남학생을 다룰 줄 아는 방식을 아셨던 것 같다. 혹시나 딸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셨는지 도닥거리는 모습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선배는 한껏 주눅이 든 모습으로 정희에게 눈길 한 번 안건네고 둑길을 걸어 학교로 돌아갔다. 정희는 선배의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엄마의 눈을 피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슬쩍슬쩍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남자야"라며 괜찮다는 의미였을까?
'눈빛이라도 한번 주고 가지... 는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정희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인 걸까 우리는?'
정희는 아까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선배의 어깨가 축 늘어져 보여 가서 토닥토닥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꾸중을 들을까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책을 펼쳤지만 머릿속으로는
'엄마는 무슨 말을 하셨을까?' 궁금한 마음에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엌 쪽에서 엄마의 저녁쌀을 조리에 거르는 소리에 이어 솥단지에 쌀을 안치고 뚜껑을 쾅 닫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정희 마음도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엄마도 맘이 안 편하셨던지 방 쪽으로 머리를 내밀며 소리치신다.
“대학 가서 찾아오면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너도 정신차렷 이것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무슨!"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머리에 피가 마르면 죽는 거 아닌가? 정희는 그 말뜻이 그때는 몰랐지만 어른이 돼서야 '아주 어린것들'이라는 속뜻을 제대로 알게 된다.
그날 저녁 순돌이 집옆에 한그루 장미나무를 발견한 정희는 반가움에 인사를 건넨다.
이제 겨우 한 꽃봉오리가 수줍게 살짝 열리고 있는 빨간 장미였다. 선배를 보듯 바라보았다.
"반갑다, Red rose!"
'산에도 장미나무가 있구나....'
그날은 그렇게 하루가 무던히도 길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헤어지라고 한건 아니구나 우린 헤어진 게 아니구나 대학 가서 만나라는 거구나.'정희는 안도의 숨을 들이키며 그 후 1년은 공부에 매진했고 그들의 연서 릴레이는 거기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지 뭐! 이제 한 3년~4년 남았는데 공부하다가 대학 가서 만나면 되지 뭐...
그렇게 2학년 겨울방학이 되고 정희는 중3이 되었다.
선배는 시내에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중3이 된 소녀는 공부에만 신경을 썼다. 이후로 엄마의 눈치가 보이기도 해서 다시 성적을 올려놓았다. 전처럼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고등학교 가면 어디서든 얼굴은 볼 수 있을 거고 대학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