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여름방학이 한창일 때이다. 친한 후배가 생일이라고 정희를 초대를 했다. 선배네 집 아랫마을에 사는 후배가 선배를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고 선배네 집 쪽으로 이끌었다.
"오빠가 요즘 방학이라 집에 있을 거야.."
마침 지게에 뽕잎 한 단을 가득 지고 마당으로 들어오는 선배와 마주쳤다.
생각지도 않았을 정희를 본 선배는 당황하는 눈빛이 살짝 스친다.
"안녕! 오랜만에 본다. 잘 지냈지?"
지게를 마당에 내려놓고 땀을 닦으며 정희에게 악수를 건넨다. 수줍게 인사를 나눈 둘은 마루에 걸터앉아 그동안 못했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고 눈치 빠른 후배는 시원한 미숫가루를 타와서 마루에 내려놓는다. 엄마와 동석한 이후로 처음 얼굴을 대하는 터였다.
고등학생이 된 선배랑은 반년이상 못 본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서인지 키가 한 뼘쯤 커 보였다.
선배가 부엌에서 오디를 한 접시 가득 내어온다.
"아 이거 양철집 지나가다가 몇 개 따먹었는데 여기서 또 보네? 이거 먹으면 입술이 시퍼레지잖아"
정희는 입에다 몇 개 넣고 오물오물거리며 입을 가리며 웃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이라 웃음이 나왔다.
"안토시아닌 색소를 띠어서 그래! 그래도 오디가 사람한테 좋다고 하니 많이 먹어~"
선배는 정희에게 내 줄 게 없어서인지 오랜만에 봐서 조금은 멋쩍은 지 눈을 잘 마주치질 않았다. 학교 공부할라 집에 오면 누에 키우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선배를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누에를 키우는 일은 손이 많이 가고 쉽지 않겠구나.'
노모를 위해 막내아들인 선배가 집안일을 하는모습도 착해만 보였다.
선배네는 대부분의 산골마을 사람들처럼 약간의 밭농사와 부수입으로는 누에를 키우는 일을 하는 집인가 보다고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정희엄마의 대학 가서 만나라고 선언한 이후 거의 못 보다가 오랜만에 후배의 초대로 간 거긴 하지만 정희는 선배를 볼 수 있을까 내심 마음속으로는 설렘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얼굴을 한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다가 선배가 마루에 살며시 책 한 권을 놓는다.
'까뮈의 이방인'이다.
"이 책 읽어봐 필독서 중의 하나야.'
"어 알베르 까뮈네~!? 시지프스의 신화 쓴 사람인가? "
"응 , 맞아 책 많이 읽었네? 페스트도 읽어보고~"
책이야기를 하다 보니 꽤 시간이 흘렀다.
"해지기 전에 어서 버스 타야지~" 이 동네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며 재촉을 했다.
정희엄마가 눈치채면 안 돼서 정희는 후배의 배웅을 받으며 서둘러 귀가를 했었다. 그때가 불과 한 달 전 일이다.
교실 앞에서 나경이를 기다리며 한달 전 일을 회상하였다.
정희는 옆반에 나경이를 손짓을 해서 불러내 말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영배선배와 무슨 사이야?" 다짜고짜 정희가 날이 선 말이 튀어나갔다.
"너와 헤어졌다고 하던데?"
"선배가 그렇게 말했어?"
"응, 너랑은 헤어졌다고. 우린 같은 교회에 다녀." 나경이는 당당한 얼굴로 말을 짧게 끊는다.
'우린~? 우리라고?'
소녀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져서 수업 시작종이 칠 때까지 서있었다. 나경이가 우리라고 한말에 한방 얻어맞아 넉다운된 소녀는 망연자실 눈의 초점을 잃었다.
'아 이게 무슨 일이지? 선배를 좋아하는데...."
정희의 엄마가 분명 대학 가서 찾아오라고 그러면 만나게 해 준다라고 보냈다던데 그래서 대학 갈 때까지 기다리며 의리를 지키려고 했는데
'엄마가 하신 말씀이 사실이 아니었나?
사랑이 뭐 이래? 이렇게 쉽게 맘이 바뀐다고? 나의 첫사랑이 이런 식으로 끝나다니. 이게 남들이 말하는 차임! 이란 건가? '
정희는 처음으로 설레는 마음에 편지를 주고받았던 지난날을, 비 오는 날 우산 속 데이트를 했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꿈이었나 이건 꿈인가 하며... 혼잣말을 되풀이를 하였다.
그날 집으로 오는 길에 비가 내린다. 정희의 마음을 아는지 추적추적 내린다. 울고 싶은 마음에 뒷동산에 올라갔는데 곱게 피어있던 그 붉은 장미가 줄기가 꺾여 꽃이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이럴 수가! 나의 첫사랑도 이렇게 꺾이는구나'.
정희는 소리 내어 비와 함께 울었다.( Red rose가 비바람에 꺾여 있었다.)
'만남은 혼자 끝내는 게 아니지. 확실히 끝내야지!'
생각이 들어 짧게 한 줄로 메모를 해서 접고 또 접어 필통에 넣었다.
"우리 다시는 아는 체하지 말기로 해요. 어떻게 이래요?"
긴말이 필요 없다 생각했다.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 쪽지를 받으면 내가 왜 그런지 알 거라 생각했다.
선배는 아파야 한다. 나한테 상처를 주었으니 다시는 아는 체도 하지 않으리라. 정희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두 번 접은 메모를 봉투에 넣지도 않고 후배에게 선배 만나면 전해달라고 다시 부탁을 했다.
"이 쪽지 선배오빠한테 좀 전해줄래? 답장은 필요 없다고 전해줘~"하며 이방인과 함께 건넸다.
정희가 비장하게 말하자 후배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언니 무슨 일이야? 오빠랑 무슨 일 있는 거야?"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아. 오빠한테 직접 물어보렴~"
정희는 부글거리는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이 들었다. 순수한 첫 마음이라 더 상처가 컸다.
그렇게 정희의 첫사랑은 끝이 보였다.
정희 드디어 여고생이 되다!!
집에서 J시까지 3년 내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다 보니 버스를 탔을 경우에도 어쩌다 선배를 멀찌감치 실루엣으로 한 공간에 있음을 알았지만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선배가 한 번이라도 자기를 봐달라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지만은 일부러 그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른 종이가 바스락거려 흩어져 버릴 것 같은 정희의 마음은 선배를 마주칠 때마다 가슴속 묻어두었던 생채기가 아프고 아프고 아팠다. 정희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남학생을 사귀지 않았다. 몇 번의 사귀자는 제의를 받았는데 다 남학생들이 똑같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