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예과 애들이었다. 일대일이 아니라 부담이 없는 과팅은 한번 나가볼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정희는 꽃핑크 카디건을 입고 살랑살랑 미팅을 나갔는데 제법 깔끔하게 생긴 파트너가 마음에 들었다. 나이도 같은 나이고 유머가 있어 대화가 통했다. 애프터를 신청하길래 받아주었고 주말에 탑건 영화로 보러 가고 시식코너에서 이탈리안 돈가스도 같이 썰었다.
몇 번의 만남 이후에 갑자기 성이 같길래
"본관이 어디야?"
그런데 같은 본관을 말하는 그 애. 그때만 해도 동성동본은 만남을 하지 않았던 때였다. 둘은 그날 이후로 쿨하게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가끔 오다가다 만나면 차 한잔 정도는 했고 그 애의 미팅한 이야기도 들어주는 친구가 되었다. 그 친구는 이후로도 사대 친구와 미팅을 했는데 또 동성동본이어서 난감했다고 호탕하게 말한다.
"나 공부만 하라는 팔자인가 봐!!"
이후로도 학교에서도 집으로 가는 길에서도 몇 남학생들이 추파를 던지고 편지를 보내도 정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연애 감정으로 만나는 관계는 아직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비 오는 날은 우중충한 마음에 혼자 음악감상실을 찾았다.
선배의 뜻밖의 연락
2학년 가을이다. 학교로 학보가 한통 왔다. 신학대 학보였다.(80년대의 학생들은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고 주로 친구들과의 연락은 편지로 하거나 학보를 2번 접어 메모를 안쪽에 넣고 학교 우체국에서 보내곤 했었다.)
'나는 이 학교엔 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궁금해서 학보를 열어 메모가 있나 찾아보았다.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레드로즈 선배의 몇 자 안 되는 글씨체를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나 다음 주 월요일에 군에 간다. 가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데 이번주 토요일 네 학교 앞 00 다방으로 아침 11시까지 와주면 좋겠다."
딱 두 줄의 글인데 간단명료한 문장이었지만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과거의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 나눠야 할 말들이 있을까? 이미 다 끝난 지나간 일들이고...'
나갈까 말까를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나가지 말자였다. 정희는 어릴 때의 상심이 그렇게 오랜 흔적으로 깊이 파여 아직도 아물지 않음을 알았다. 배신감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 느껴서인지 제대로 남자를 사귀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외면....
그렇게 선배는 군대를 갔다.
정희가 그렇게 보내버렸다.
그렇게 인연은 끝난 줄 알았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정희는 겨울방학에 친구 따라 나간 우연한 자리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제복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K 법대 졸업반이었고 정희와는 두 살 차이가 났다.
첫인상이 그다지 호감이 가질 않았다.
'오늘은 제복 입은 남학생의 일상은 어떻게 되는지나 알아보자' 싶어 일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친구를 대하듯 마음 편히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연락처를 묻는 남자에게 "제가 연락드릴게요."라고 살짝 거절의 표시를 했다. 그저 맘에 들지 않았다. 아직 남자를 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질 않았다.
며칠 뒤 친구가 연락처를 줘도 되냐고 물어봤지만 거절을 했다. 거절을 한 이유는 생활에 안정은 있겠지만 가정적인 남자로는 아닐 것 같아서였다. 정희는 정희의 아빠 같은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기를 바랐다.
아직까지도 남자를 만나는 일에 피해의식이 늘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다.
'또 변하겠지~ 딴 여잘 만나겠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는다.
그 후로 2년간 남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끊임없이 정희를 만나러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차 한잔 마시고 그냥 얼굴만 보고 가도 말없이 그렇게 계속해왔다.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아도 그 남자 참 무던하다.
정희의 대학 졸업식엔 그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부모님과 엉겁결에 이렇게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하다 보니 군에 재직 중인 그 남자는 열쇠도 필요 없고 딸만 주시면 잘 살겠다고 정희의 부모님을 설득했고 그런 남자가 적극적으로 쫓아다니고 구애를 하니 반대할 일이 없었다. 부모님은 정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집으로 초대를 하여 사위될 사람인지 그의 면모를 살피기 시작하게 되었다. 남자의 외모는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고 175 정도의 중키에 마른 몸에 입술이 툭 튀어나와 잘못 보면 북한 군인 같은 생김새였다.
"왜 싫다는 거야?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엄마는 한 소리하신다.
"그래도 정이 안 간다고!"정희도 한 고집한다.
"너한테 잘하잖아~ 사람을 봐야지 외모 그거 별거 아니야."
"엄마가 데이트를 안 해봐서 그래! 그냥 박력도 없고 말도 없고 답답해."
"아빠 봐라 인물이 신성일 뺨치게 생겨서 엄마 젊었을 때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
정희아빠는 외모가 출중하시고 똑똑하셔서 대학에서도 아주 날린 인물이었다. 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에 보이스카웃단장에 웅변도 운동도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남이셨던 게다. 잘 생긴 사람이 그 당시에 학교에서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지금의 팬클럽이 있었다면 인싸였을 게 분명하다 ,
그래서 정희엄마는 그 여자들을 정리하고 뒤처리들을 하느라고 맘고생도 어지간히 하셨던 게다.
그런 걸 아시는 정희엄마는 남자 얼굴 볼 게 아니라고 정희를 다독거리며 인간만 보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게다. 그래도 아빠는 결혼 이후에는 가정밖에 모르는 아빠로 변해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 주었다. 그런 아빠를 보며 자란 정희는 아빠같이 스마트하고 가정적인 남자를 은근히 결혼상대자로 꿈꾸며 자랐던 거 같다.
진실
엄마가 화장대 앞에서 외출 준비로 얼굴에 분을 바르고 계셨다. 정희는 엄마가 앉아있는 의자옆으로 엉덩이를 빠작 들이밀며 물었다..
"중학교 때 그 영배오빠 기억나? 대학 가서 찾아오라고 했던?
진짜로 대학 가서 찾아오면 만나게 하려 한 거야?"
"아니 그땐 둘이 떼어 놀려고 그랬지. 감수성이 예민한 그 나이에 무조건 헤어지라고 하면 너한테 해코지할까 걱정도 되고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을 까봐 시간을 벌은 거지."
"이상하다 그런데 왜 안 찾아오지?"
"실은 너 서울로 대학 가고 몇 번의 편지가 왔었어. 걔하고 너하고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아니야. 그래서 너한테 알리지 않은 거야."
"엄마!!! 왜 그랬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군대 간다고 연락 왔을 때 그 자리에 안 나갔단 말이야 "
정희는 세월이 흘렀어도 어릴 때 첫마음을 송두리째 주었던 영배선배를 마음속에 늘 한쪽에 두며 살았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꽤 있었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언젠간 풀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 기회가 오지 않았다.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