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집에는 늘 강아지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좋아했다. 집 안에서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니 다들 마당에서 살았다. 대문이 열려있을 때 집을 나간 아이도 있고, 쥐약을 먹고 죽은 아이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새끼를 낳아 집 안에 꼬물꼬물 귀여운 아이들이 가득한 기억도 있다. 어른이 되어 나 스스로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어쩌면 늙기 시작하고 우울증에 걸리고 이런저런 삶의 힘든 시간들이 참았다 한꺼번에 봇물 터지던 시간 동안 내게 버틸 힘을 주고 웃음과 행복을 선물한 건 모두 사람이 아닌 강아지들이었다.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내 삶에 찾아와 준 아이들을 그려보련다. 김별, 두리, 타샤, 블루, 보리, 그리고 장군이.
오십 즈음되었을까.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우울증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멋있었다. 가벼운 삶이 어찌 우울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으랴. 그런데,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가기만 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겁이 났다. 먹지도 않았고, 자는 일도 잊었고, 온종일 무기력했다.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게 다 이해됐다.
몇 년 후 또 우울증이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그 무서움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뭔가 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나만을 위해 강아지를 입양했다. 집 안에 생명체가 같이 산다는 건 우울한 삶에 엄청난 위로가 된다. 동네 펫샵에 막 태어난 시츄 새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네 마리던가. 그중에서 가장 성깔 있어 보이는 아이를 데려왔다. 그리고 별이라고 불렀다. 사실 아내가 정한 이름인데 별이가 너무 흔해서 나는 김별이라고 불렀다. 김 씨 족보다.
아내는 별이를 시츄계의 김태희라고 불렀다. 예쁘고 귀엽고 애교 많고 장난꾸러기인 별이는 그저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김별은 나의 노인성 우울증을 치료했다.
아기 김별
언제부턴가 별이는 물을 많이 먹고 오줌을 한강처럼 쌌다. 나는 그저 별이가 하마라고 웃었고, 아내는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했고, 나는 무시했다. 강아지에 대해 아내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분명히 내가 더 컸다.
어느 날, 별이가 토하기 시작했다. 동네 동물병원에 데려가니 살이 너무 빠졌단다. 소화제 같은 약은 줄 수 있지만 아무래도 큰 병원에 데려가는 게 좋을 것 같단다. 그제야 불안해졌다. 피검사 결과를 본 수의사가 말한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장이 너무 망가졌습니다. 모든 수치들이 정상의 열 배 혹은 수십 배가 넘었다.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콩팥 장애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별이의 콩팥은 정상적인 것들보다 너무 작았고 찌그러져 있었다. 그러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콩팥이 망가진 거다.
신장이 나쁘면 몸 안에 독이 쌓이니 물을 많이 먹고 그럼 오줌도 많이 싼다. 다음다뇨. 신장이 나쁜 강아지의 전형적인 증세임에도 그걸 몰랐다. 나는 별이를 사랑한 게 아니었다. 귀여우니 좋아했고 별이 때문에 내가 좋았을 뿐, 별이의 몸과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다. 강아지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아지의 상태와 행동을 잘 관찰해서 아픈걸 미리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강아지를 키우는 자의 최소한의 책무인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의사는 가능성이 없으니 그냥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를 권했지만, 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집에 가면 죽는 일뿐이 없다. 병원에 있어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없을지도 모를 기적 같은 가능성을 바라면서 입원을 시키고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죄책감을 덜려는 선택이었을까.
입원해있는 별이 면회한 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작은 수치의 감소에 마치 별이가 살아날 것 같아 기뻐했고, 수치가 나빠지면 온종일 마음이 무겁고 슬펐다. 은퇴기념으로 친한 친구와 몽골여행을 기획했었다. 곧 떠날 시간이 되었지만 별이가 아팠으니 모든 것을 다 포기했다. 별이한테는 당신이 필요해. 아내가 내게 한 진심의 말이었고 난 그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했으니까. 면회를 가면 산소룸에서 주삿바늘을 꽂고 누워있던 별이가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 남아있는 힘을 다해 꼬리를 치고 눈을 맞춘다. 그런 별이를 다시 그곳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눈물 투성이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였던가. 아무 가능성 없는 치료였음을 별이만 몰랐을까. 의사도 나도 암묵적인 공범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일어서지도 못하고 나를 보고도 꼬리를 흔들지도 못하는 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마지막 순간은 외롭고 낯선 병원이 아니라 별이의 집이어야 했으니까. 입원 중간에 하루 이틀 집에 온 적이 있다. 매일 산책하던 개천가 길로 데려가면, 별이가 정말 죽을힘을 다해 걷는다. 늘 걷던 길, 늘 맡던 냄새, 그리고 마지막 걸음.
거실에는 별이 집이 있고 소파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마지막 날, 별이는 계속 넘어지면서도 집으로 들어가고, 계단을 오르려 애쓴다. 그리고, 오줌을 누려고 배변패드로 걸어가다 넘어지고 또 걸어가는 별이를 붙잡고 난 통곡했다. 별이야 그냥 여기서 오줌 눠도 돼. 괜찮아.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별이와 같이 누웠지만 우리는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별이가 편하게 잠드는 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새벽이 되었고, 별이는 이불에 설사를, 아니 피똥을 쌌다. 혼자 물을 먹을 수 없으니 주사기에 물을 넣어 별이 입 속에 넣어줬고, 그것이 끝이었다. 물을 한 모금 넘긴 별이는 큰 한 숨을 쉬고는 마지막 숨을 거뒀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많은 눈물이 흘렀다. 사람의 죽음보다 짐승의 죽음이 더 슬프다.
내가 한 일은 땅을 파는 것이었다. 정원 큰 나무 아래 별이가 잠 들 곳을 만들었다. 깊이 팠고 별이를 묻었고 행여 들짐승이 파지 못하도록 그 위에 돌을 얹고 다시 흙을 덮었으니 그것이 김별의 무덤이다. 지금도 마당에는 내 첫사랑 김별이 잠들어 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다. 별이를 사랑했지만 아니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물었단다. 강아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제일 듣고 싶으냐고. 사랑해요. 고마워요. 행복해요. 이런 말들이 아니었다. ‘나 아파요’였다. 그렇다. 짐승들은 죽을 때까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니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미안하고 슬펐던 경험들이 많았던 거다. 그래서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제발 아프다고 미리 말을 해 주기를 바라는 거다.
두 살 반. 너무 짧은 삶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게 큰 웃음과 행복을 주었고, 그보다 더 큰 슬픔과 미안함을 주었다. 김별에게 무슨 말을 한다면, 그건, 별아 미안해, 네가 아픈걸 좀 더 일찍 알았어야했는데. 그리고, 사랑하고 아빠를 만나줘서 고마워. 김별 때문에 행복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