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뜰 때부터 슬픈 날이 있다. 그런 날은 하루를 사는 일이 버겁다. 다시 잠들어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눈을 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미 틀렸다. 오늘은 우울한 날로 정해진 거다. 아이들 산책을 시키고 나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이젠 내가 걷는다. 걸어야만 우울, 고독, 슬픔, 그리고 공포 따위의 신파스런 감정들을 버텨낼 수 있다. 오늘은 더 슬픈 날이니 더 많이 걸어야 한다.
나무 아래 그늘에는 벌써 사람들이 모여있다. 죄다 노인들이다. 두세 명이 조용히 말을 나누기도 하지만, 웃고 떠들고 목젖을 세워 욕해대는 무리들도 있다. 다들 슬퍼서 길로 나온 사람들이니 나와 다를 것이 없다. 늙었고, 병들었고, 쓸쓸하니 눈 뜰 때부터 슬퍼지고 혼자 있으려니 두려우니 약 먹듯이 길로 나오면, 또 나같이 슬픈 자들이 거기에 많다. 아직 아침 열시도 전이지만 벌써 막걸리 병이 있고 그 옆에는 평상에 누워 잠든 노인도 있다. 술이 깨고 잠이 깨면 또 혹은 더 슬퍼지겠지만 잠시라도 마취되어 느끼지 못함도 어쩌랴.
누군가 만나서 부질없이 떠드는 것도 좋겠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다 토해내도 좋겠다. 그런데, 날 사랑하기는커녕 관심이든 연민이든 아무것도 없는 이 앞에서 내 처지를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겪어봐서 잘 안다. 결국 후회하고 내 어리석음이 심히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글로 독백함이 더 낫다.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속으로 나를 비웃는 사람도 없다. 내 앞에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가슴에 갇혀 깊어지고 무거워진 우울, 고독, 슬픔, 그리고 공포 따위의 감정들을 적어도 몸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니 그만큼 내 가슴은 가벼워진다.
이런 날엔 오후에 또 걸어야 한다. 개천 다리 밑에서 젊은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젊어도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