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할을 명확히 찾는 시간.
회사는 회의가 정말 많았다. 한 브랜드 내에서도 드레스류의 옷들, 캐주얼한 분위기에 입는 옷들, 일할 때 입는 옷들, 쉬는 날 입기 좋은 옷들 등으로 디비전을 나누고, 그 안에서 아이템 별로 바이어, 디자이너, 머천다이저, 패브릭 팀 등 각 담당들이 나눠져 있다. 거의 매주 디비전별, 아이템별로 회의를 해서 관련 스텝들이 모이는데, 대대적인 시즌 회의가 아닌 이상 보통 1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아, 지금까지 내가 이 회사에서 뭐하는 사람인지 언급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컬러리스트이다.
우리 부서가 하는 일은 패브릭 컬러를 기획, 시즌 팔레트 및 보드를 만들고 브랜드 내에서 컬러 발란스가 깨지는 일이 없도록 옷이 매장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전체 과정을 조율한다.
더 쉽게 풀자면, 어떤 색 옷을 만들 것인지 컬러들을 제안하고, 디자인된 옷들의 컬러 코디 계획에 문제가 없는지 체크하고, 실제 생산되어 올라오는 샘플, 실제 상품들이 계획된 대로 염색, 프린트 되었는지 확인한다. 컬러 문제가 있을 경우, 어떻게든 해결 할 수 있도록 솔루션을 제안해야 한다.
컨셉에 따라 컬러들이 선택되면 시즌 팔레트가 만들어진다. 디자이너들이 팔레트 내의 컬러에서 각 아이템을 디자인하는데, 이 때문에 가끔 서로 실랑이가 있기도 하다.
팔레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디자이너들이 자기 아이템에 넣고 싶은 컬러를 넣어 달라고 찾아 올 때가 있다. 스스로가 만든 옷에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에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다 넣어주다 보면 매장의 컨셉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사라지고 형형색색만 남게 된다. 게다가 안팔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서로에게 슬픈 순간만 찾아 올 뿐이다.
서글픈 순간이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중간 점검 회의를 매주 진행한다. 기획된 디자인과 컬러들이 보여지는 라인 시트와 샘플들을 보면서 업데이트 된 내용을 모두와 공유하고 이슈가 있을 경우 솔루션을 찾는다.
한국에서 회의는 주로 상사가 이야기 하고 직원들은 듣고 있는 일방적인 전달 체계가 대부분이었다. 중간에 상사의 말을 끊기라도 한다면, ‘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라는 의아함이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회의는 다르다. 각자의 분야에서 해야 할 코멘트를 꼭 이야기 해야 한다. 바이어가 틀리게 말하는 경우에는 그 즉시 말을 끊고 자연스럽게 정정해준다. 침묵을 지키다가 후에 자기 분야때문에 사고가 발생하면 무능력하고 말도 못하는 바보같은 사람이 된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하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랑 일하는 바이어는 중간에 치고 들어오는 말들이 많아서 미팅 때마다 이 말을 제일 많이 했다.
파워가 제일 큰 바이어도 독단적일 것 같지만, 각 부서의 의견을 존중한다. 판매율이 안 나오는 순간 제일 일선에서 해고 되기 때문에 자기가 깊게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모든 의견을 충분히 다 듣고 결정 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가끔 감성적으로 흘러갈 때도 있다.
옷 샘플을 받았는데 팔레트에서 벗어난 색이었지만 예쁘게 나왔다며 바이어가 그 색 그대로 옷을 공급 받겠다고 했다.
“그 컬러는 팔레트에서 벗어 났어. 그러니 같이 코디해서 팔 수 있는 옷도 없고. 게다가 광고용 샘플이라 조색을 해서 나온 색이 아니야. 데이터가 없이 나온 색이라 실제 제품에서는 그 컬러가 안 나올 가능성도 있어. ”
난 반대 의견을 덧붙였지만, 그 옷에 반한 바이어의 고집을 꺽을 수 없었다.
이런 일은 항상 추후에 책임 소재가 뒤따라 오는 경우가 많다.
모든 회의와 스타일을 100% 정확히 기억 할 수 없어서, 샘플텍에 노트를 했다.
‘x시 x분 X월 x일 2xxx년, 바이어가 진행 컨펌함’
안타깝게도, 스토어에 들어 갈 상품이 샘플 컬러와 다르게 나왔다.
시니어 바이어가 나에게 달려왔다.
“ 이 색은 왜이래? 도대체 어떻게 팔려고 했던 거야?”
‘음. 내가 왜 그랬지?...’
이럴 때는 누가 최종 승인 한 것인지 확실한 기록을 찾아야한다.
내가 사인 한 것이면 왜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서 납득시켜야 한다.
컬러리스트는 예쁜 색을 찾는 사람들로만 생각 할 수 있는데, 선택한 색에 대해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항상 함께 수반된다.
“아 맞아, 그거 안된다고 했는데, 바이어가 라인에 최종 넣는다고 했어. 여기 텍에 써 있는 거 봐봐”
시니어 바이어가 담당 바이어쪽으로 시선을 돌려 질문을 쏟아낸다.
“왜? 어떻게 팔려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상황에는 슬쩍 자리를 피하는게 상책이다.
회의가 너무 많고 끝없이 이어질 때도 있지만, 미팅을 통해 업무를 공유하니 전체 진행 과정을 알게 되고 나의 역할을 명확히 하게 된다. 게다가 토론을 통해 아이디어를 모아 이슈를 해결하니 유용한 시간이다.
내일도 회의가 잡혔다.
‘짝궁 컬러가 없는 아이템을 왜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케이스 스터디 미팅이다.
바이어 얼굴에 먹구름이 낄 것 같다. 멀리 앉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