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 같던 첫 회의
회사에 일찍 가서 아침을 먹으면서 업무 메일을 읽으면, 생산적이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아침의 주 메뉴는 딸기잼을 바른 베이글, 우유에 포~옥 말은 콘프레이크(아예 박스로 사서 책상에 두고 먹었다.) 그리고 집에서 챙겨 나온 샐러리, 방울 토마토, 사과, 포도 꾸러미였다. 딱히 건강한 메뉴는 아니었지만, 아침 먹고 힘내서 일해야지라는 생각으로 항상 열심히 챙겨 먹었다.
출근 한 지 3일째 되는 날, 사과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유유자적 메일을 보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아, 오늘 홀리데이 팀 전체 회의가 있는데 잊었어. 같이 참석 해야해. 빨리 가자.”
홀리데이팀은 내가 담당하게 된 부서이다.
쉬는 날에 입기 좋은 편안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컨셉의 옷을 만들었다.
서둘러 지정되었던 회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앗. 여기가 아니네.’
모든 부서가 회의가 많아서 가끔씩 회의실이 여러 팀에 중복 예약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어느 한 부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했는데, 이날이 그 날이었다. 늦었는데, 더 헤매었다.
여기저기 회의실을 돌아보다 홀리데이 팀 회의실을 찾았다. 전체 회의라 의자가 부족해서 다른 곳에서 직접 가져와서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아직 회의가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웃으면서 떠들던 사무실 분위기가 아니다. 뭔가 착 가라앉은, 냉한 공기가 다리 아래까지 가라앉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회의실을 둘러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 엑셀 자료를 보며 앉아있다. 늦은 와중에도 팀 매니저가 내 소개를 했다. 웃으면서 인사하는 듯 하지만 오늘 일어날 안좋은 일을 예고하는 듯한 표정의 그는 어카운트 매니저였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내 머리 속에는 바이어가 가장 파워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카운트 매니저가 먼저 입을 떼기 시작한다.
“홀리데이 팀, 지난 분기 실적이 상승세였는데, 이번 분기는 20% 이상 하락 했습니다. 판매율이 왜 이렇죠? 이유가 뭡니까? 어떻게 해결 할 예정 입니까? 무슨 대책이 있습니까? 이런 결과로는 저번에 배정되었던 예산보다 확 줄여서 배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띵~ 회의실이 완전 조용해지고, 완전 작은 내 눈이 확 커지고 동그래졌다.
조곤조곤 하지만 냉기 서린 말투였다.
눈을 꿈벅꿈벅 왔다 갔다 굴리며 회의실을 살폈는데, 아...이 분위기 어쩔 것인가.
금방이라도 깨질 살 얼음 위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 것 같다.
바이어가 애써 실적 하락의 이유에 대해 설명을 시작한다.
평소에는 목이 부러질 것처럼 빳빳하고 당당해 보였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어깨가 유독 작아진 것 같아 보인다. 이 테이블에서 파워 없기로는 다섯 손가락도 필요 없이 바로 꼽힐 내 주제에 바이어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새 시즌 샘플들을 보여주며 판매 플랜에 대해 논의했다.
몇몇 굵직한 의견이 오간 후, 어카운트 매니저는 ‘이번 시즌 잘 되어야지 계속 이 실적이면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는 코멘트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모든 파워를 가지고 권세를 누리는 것 같던 바이어도 결국 실적 앞에 작아지는 우리와 같은 피고용인이었다.
‘끝난건가…’
끝난건가 싶었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분이 안좋지만 꾹꾹 눌러 참은 바이어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새 시즌 옷 샘플들을 다 가져와서 같이 확인하면서, 어떻게 팔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계속 물었다.
옆에 앉은 디자이너가 나에게 새 시즌 라인 스케치 페이퍼를 전달해 주었다. 어떤 스타일을 빼고, 어떤 것을 다시 넣어야 할지 의견이 쉴새없이 오갔다. 탈락 한 옷들은 펜으로 엑스를 찍찍 그어주고, 강조되는 스타일에 동그라미를 마구 쳐 줬다.
의류 회사는 한 명의 고객에게 옷을 한 벌만 팔고 싶지 않다. 될 수 있으면 준비한 것들을 많이 팔고 싶기 때문에 브랜드 안에서 코디해서 입을 수 있는 짝궁 옷들을 꼭 같이 만든다. 어떻게 짝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계속 조율하고 의견을 내야한다. 짝궁이 없으면 엑스를 찍찍 그어줘야 한다.
전체 미팅에 처음 들어간 날이고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서, 새 시즌 플랜에 대한 우리팀 코멘트는 내 매니저가 대신 해주었다. 아, 다행이다.
보통 한국에서 미팅 분위기가 무거워지면 상사 외에는 거의 말들을 안하는데, 여기는 달랐다.
회의에서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했다. 말을 안하면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사람 같고, 결국 능력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여졌다.
미팅이 끝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팀 동료인 K가 미팅 참석이 어땠는지 다정히 물어봐 주었는데, 눈을 크게 뜨며 말 없이 머라 말 할 수 없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녀가 눈을 찡끗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K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미 다 아는 것 같다.
오전 한 건의 미팅이었고 나는 말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곳에 앉아있던 것 만으로도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 빨리 점심을 먹으러 가서 에너지 충전을 해야겠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닭고기 스프와 바베큐 소스 치킨 샌드위치를 입이 터지도록 마구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