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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뚝검 Jul 23. 2021

슬기로운 검사생활

제1장  지난 8년을 기록하다

처벌과 자존심


    어두침침한 사무실에서 혼자 빛나는 스탠드불빛.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기록 뭉치들. 80년대에나 사용했을 법한 구형 캐비닛.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검사와 피조사자의 숨 막히는 기싸움.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검사실의 모습은 대개 이렇다. 설마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고,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며 민사소송도 전자소송으로 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정말 손때가 묻은 종이기록을 황금 보자기에 묶어 옮길까, 작가들은 검사실 한 번 찾아보지 않고 시나리오를 쓰는 걸까 의아해하는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실제 검사실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JTBC 드라마 '검사내전', 차명주 검사(정려원 분)와 김정원 검사(전성우 분) 뒤로 보이는 사건기록들 [출처 : JTBC 홈페이지]


    기록 속에는 경찰의 1차 수사결과가 담겨있다. 검사는 기록을 검토하고 CCTV 영상, 계좌 사용 내역, 휴대전화 사용 내역과 같은 객관증거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진술증거, 당사자들의 주장과 상반되는 정황증거 등이 있는 때에는 별다른 조사 없이 기소, 불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추가 수사가 필요한 경우, 예를 들어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거나 당사자의 생활환경 또는 범행에 이른 경위를 듣고서 구형을 결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당사자를 직접 만난기도 한다. 당사자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역사와 우주를 마주하는데, 그 파편은 내 기억에도 남는다.


실제 검사실. 캐비닛에도, 책상에도, 그 뒤편에도 기록이 잔뜩 쌓여있는 모습이 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초임검사는 처음 몇 개월 동안 교통사고 사건, 음주무면허운전 사건처럼 비교적 쟁점이 간단한 사건들을 주로 처리한다. 내 인생 첫 사무실을 쓸고 닦으며 과연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될까 하는 생각에 쿵쾅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도 무면허운전 사건 하나를 배당받았다.


피의자 이용식(가명), 죄명 도로교통법위반(무면허운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용식은 트럭에 물건을 싣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만물상이었다. 트럭장사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몇 년째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무면허운전은 대부분 벌금형으로 처벌받는데, 얼마나 무면허운전을 여러 번 했는지 이용식은 실형까지 선고받아 교도소에도 다녀왔다. 무슨 이유인지 묻기 위해 이용식에게 출석을 요구했다.


    검사실에 나온 이용식은 그야말로 촌부의 모습이었다. 앞니가 몇 개 빠져있었고,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다. 얼굴은 볕에 잔뜩 그을려 새카맸다. 왜 자꾸 면허도 안 따고 운전을 하세요? 이용식에게 물었다. 고개를 푹 숙인 이용식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바빴습니다, 죄송합니다 답했다. 간단한 사항을 조사하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다. 한참 동안 조서를 읽은 이용식은 삐뚤빼뚤 이름을 적고, 손도장을 찍었다. 마지막으로 조서를 읽어보는데 이용식의 진술 부분에 오탈자가 있었다. 이용식에게 볼펜을 건네주며 오탈자를 고쳐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용식은 펜을 든 채 조서만 바라보았다. 여기 두 번째 줄 주소가 틀렸잖아요. 고쳐주시겠어요? 재차 말했다. 이용식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검사님, 제가 글을 못 읽습니다. 이름이나 쓸 줄 압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경찰조사 받을 때도, 지금도 조서 다 읽어보셨잖아요!
그게 사실은……. 제가 글을 모르는데 글 모른다고 말하는 게 미칠 듯이 쪽 팔려서요.


    청천벽력. 글도 못 읽는 사람이 글을 아는 양 조서를 읽어보고 아니, 쳐다보고 이름 석 자까지 적다니! 이용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왔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공장과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고 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가족들이 자신에게 미안해할까 봐, 조카들이 자신을 부끄러워할까 봐 글을 모른다고 차마 꺼내놓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글을 배우셔야죠! 그래서 운전면허시험을 보셨어야죠!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데 언제 글을 배우나요. 나이까지 드니까 글 배울 곳도 없더라고요.


    글을 모르면 배워야 하지 않느냐고, 언제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냐고 이용식을 다그쳤다. 이용식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내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나의 세상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세상을 평가하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는 유려한 솜씨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과 무언가 배우기로 작정하면 막힘 없이 배워내는 사람들이 즐비했으니 으레 다른 사람의 세상도 그러리라 단정 짓고 있었다. 지구에 있는 사람의 수만큼 역사와 우주가 존재하고, 법은 평균인의 상식이라는 진리를 까맣게 잊은 채로 글을 모르면 배우면 되지 않느냐고 이용식을 다그치다니.


    계속 트럭장사 하실 거예요? 이용식에게 물었다. 이용식은 할 줄 아는 일이 트럭 장사뿐이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용식의 사정이 안타까워 바로 도로교통공단에 전화를 해서 문맹자가 운전면허시험을 볼 수 있는지 물었다. 담당직원은 문맹자를 위한 읽어주는 PC학과 시험이 있다고 했다. 공단 홈페이지에 음성교재도 게시되어 있어서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CD에 음성교재를 내려 받아 이용식에게 주면서 읽어주는 PC학과 시험을 설명해주었다. 이용식은 그동안 이런 시험이 있는 줄 알았다면 운전면허를 땄을 텐데 공단이 있는지도 몰랐고, 알아볼 용기도 없었다고 했다. 그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얻을 수 있는 정보일 뿐인데 이것 때문에 몇 번씩이나 처벌을 받았다니, 마음이 아팠다.


교통약자(비문해자)를 위한 '읽어주는 PC학과시험'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도로교통공단 홈페이지]



얼마 뒤, 이용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검사님! 저 운전면허 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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