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가을에는 낙엽이 진다고 말한다. 물론 사실이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의미에서 가을은 새잎이 싹트는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잎이 지는 것은 겨울이 찾아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봄이 시작되어 새로운 싹이 만들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 달' 중)
진다는 건 곧 솟는다는 것이고,
간다는 건 곧 온다는 걸 암시하는 거겠지. 가을에 봄이 들어 있다는 말, 공감이 된다. 모든 작별인사에는 만남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말처럼. 왜냐하면 나도 이제 가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가을이면서도 봄이고 싶은 그리움의 욕심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일생을 사계절로 나누면,
25세까지 봄이고 50세까지가 여름이며, 75세까지 가을이고 100세까지가 겨울이라 했던가. 얼마 전까지 나는 여름이었다. 엄청난 목청으로 매미처럼 울어대는 늦여름이었다. 따가운 햇빛을 견디며 수확을 준비하는 동안 이런저런 풍파도 제법 겪었으며, 태풍 몇 개는 온몸으로 받아내는 맷집이 있었다. 그러던 나였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마음이 냉정해지는 초가을이 되었다.
그래 분명 나는 봄이 아니다.
그럼에도 봄을 소장하고 싶은 건 왜일까. 겨울 속에도 잠깐의 봄이 있고, 가을 속에도 뜻밖의 봄이 있는 것이다. 여름은 더운 봄이고, 가을은 흔들리는 봄이며, 겨울은 추운 봄이라 생각한다. 결국 봄은 다른 계절이 움켜쥐고 있는 희망인 듯하다. 그러면 나는 가을의 봄인가, 봄의 가을인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희망에 매달려 나를 잃으면 계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누가 뭐래도 지금은 가을이다.
내가 맞는 11월 중순은 엄연한 가을이다. 가을에는 가을을 누리며 가을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가버린 봄을 찾거나 지나간 여름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냥 이 가을, 단풍잎처럼 붉게 타오르면 되는 것이다. 봄꽃이나 가을꽃이나 최선을 다해 피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꽃도 흔들림 없이 피는 꽃은 없다지 않던가. 내가 사는 계절을 알아가며 제철대로 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