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철학을, 철학에 일상을 2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내가 누는 것이 바로 나’라고 말하고 싶다. 똥 말이다. 내 똥의 상태가 나의 상태다. 평소 내 똥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과식하거나 육식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다 잘 얻어먹고 온 다음 날에는 똥에서 구린내가 난다. 필요 이상의 음식을 먹었다는 의미다. 구린 똥을 눈 날에는 얼른 먹는 것을 조절한다. 그러면 다시 구린내 없는 똥을 누게 된다. 욕심 없이 산 것 같아 개운하다. 뒷거래를 하거나 뇌물을 먹었을 때 ‘구린내가 난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남편이 똥을 누고 물을 내리는 것을 깜빡 잊고 바삐 출근한 후, 변기에 잠겨있는 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남편이란 존재의 애틋함을 느끼는 아내에 관한 시가 있다. 남편의 똥이 양수에 웅크리고 있는 태아처럼 외롭고 연약해 보여 모성애를 자극한 걸까. 똥에서조차 생명에 대한 사랑을 느끼는 시인의 섬세한 시심이 그리운 것은 지금 내 곁에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무엇이 없기 때문이리라.
말랑하고 따뜻한 것, 그것은 곧 생명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유연하고 나름의 온기를 지니고 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는 것도 그래서다. 뻣뻣하고 딱딱하며 차갑고 섬뜩한 것은 인공적이며 죽은 것이다. 사람이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자연은 스스로의 생의 주기를 따라 완벽히 순환한다. 수세식 변기가 나오면서 똥은 오물이란 오명을 쓰게 되었지만, 원래는 거름의 역할로 제 몫의 쓰임이 있던 자연의 일부가 아닌가. 밭의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똥도 생명이다.
지금 내게 똥은 말랑한 온기를 주는 유일한 존재다. 내게서 나온 생명이다. 평소 구린내로 나의 식탐을 꾸짖고 요즘 같은 날은 설사로 나의 건강을 함께 걱정한다. 누가 있어 나를 이토록 살피랴.
신아연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