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놓아버리려고 했을 때 꿈이 나를 붙잡았다

2월의 어느 날 이야기

by 수인

나는 평창동의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또 마을버스를 탄 뒤 겨우 도착했는데 내 앞에는 오르막길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휴우, 저기를 올라가야 하는구나. 올라가야지 별 수 있나.' 사람 한 명 제대로 다니지 않는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하게 된 곳은 바로 우리나라 옥션의 양대산맥 중 한 곳이었다. 옥션은 다른 말로 하면 미술품 경매 회사이다. 미술품을 사고파는 2차 시장으로 (1차 시장은 갤러리 혹은 화랑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나는 생생한 미술시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옥션이나 아트페어 등 상업적인 부분에도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는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미술 관련 학위나 경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곳이다! 싶어서 원서를 넣었고 1차 서류심사를 통과해서 면접을 보러 가는 중이었다.


면접장에 도착해서 순서를 기다렸다.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실내 분위기, 덩그렇게 놓여있는 면접대상자를 위한 의자와 그 앞에 놓인 탁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면접은 단체면접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는 다 해외 대학 출신이었다. 내가 지망한 팀은 '국제팀'으로 회사의 해외 관련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어떻게 1차 심사는 통과했지만 어쩐지 면접을 통과하기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아도 다른 경력이나 배경이 비슷하다면 영어회화가 좀 더 수월한 해외대학 출신을 뽑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면접은 최선을 다해 보았고 마음은 비운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걸려온 전화. 회사 측에서는 '고객관리팀'으로 지망을 변경해서 최종 면접을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아무래도 내가 백화점과 로펌이라는 서비스 업계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 그 팀에 더 맞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고객관리팀에서 일을 하더라도 나중에 경매 관련 업무를 할 수 있냐는 나의 질문에 담당자는 경매를 준비할 때는 팀 상관없이 다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조금 고민하다가 바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일단 회사에 들어간 후 부서 이동 등의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고객관리팀으로 입사하게 된다면 분야만 바뀐 것이지 하게 될 일이 로펌에서 했던 일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로펌을 퇴사한 후 이렇게 갈지자를 그리며 업을 찾는 방황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랐던 미술계 취업의 언덕길을 스스로 내려왔다.


때는 2019년 2월이었다. 2016년 11월에 로펌을 퇴사한 지도 어언 2년 넘게 흐른 뒤였다. 그 시간 동안 꿈 찾겠다고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아나운서와 행사 MC 준비, 기업체 강사 준비, 교육회사 취업 등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까지 휙휙 넘나들었다. '미술'이 내게 손을 내민 까닭에 그 손을 잡으려고 지난 3개월 동안은 미술계 이곳저곳에 지원서를 넣었다. 운 좋게 때론 면접까지 봤지만 이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고 몰라서 충만했던 자신감도 점점 없어져갔다. 거듭되는 실패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이제는 일로 정체성이나 의미 찾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대학교 동기의 말이 생각났다. 다들 사회인이 된 상태에서 동아리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일에 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나는 당시 다니던 회사와 일에 대해 불평을 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듣고는 이미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한 동기가 내게 말했다. 자신은 일주일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이틀을 위해 일을 한다고. 그 동기의 말이 꽤나 어른스럽게 들렸다. 나는 이상에 사로잡혀서 현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징징이 었던 것에 반해 그 동기는 학창 시절에도 늘 어른스러웠다. 항상 불안하고 어딘가 어설펐던 내게 그 친구는 참 차분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동기에 대해 이상한 경외감이 생기는 한편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나의 삐딱한 생각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행복한 이틀을 위해 나머지 5일이 불행하다면? 그것도 괜찮은 걸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사회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자 미운 오리 새끼 같았지. 일 년 365일 라라랜드에 살고 싶어 하는 나는 도무지 이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런 내가 이제는 놓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자원과 경험과 경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문은 다 두드려보았다. 어떤 문은 나에게 조금이나마 열려 내가 그 안을 빼꼼하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은 내가 두드려도 모른 채 하고 열리지 않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용기 하나로 뛰어든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였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하염없이 두드리고만 다니는 게 지쳤다. 그래서 그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제는 나도 남들처럼 살겠다고. 일은 일일 뿐이라고. 그 언젠가 같이 일했던 한 동생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꿈을 좇는 건 나이브 한 행위라고. 그러니 나도 이제 남들처럼 일에 대해 큰 기대하지 않고 이상도 버리겠다고. 그렇게 탁! 놓아 버린 순간, 꿈이 나를 붙잡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원서를 넣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반은 기쁘게 또 반은 덤덤하게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혹은 어쩌면 갑자기 미술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다 이젠 정말 모르겠어! 하고 손에 쥔 그 조각들을 다 놓아버리려 할 때, 꿈이 내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말라고, 여기 널 위해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리고 나도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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