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작은 일에도 눈물을 쏟을 정도로 감성이 흘러넘쳤고, 공부를 좋아하는 이상한 아이였으며 (물론 수학은 울면서 공부할 정도로 싫어했다.) 회사에서는 너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러냐-는 말을 듣는 욕심 많은 나이브한 사람이었다. 요컨대 남이 보는 나는, 혹은 타인의 시선이 투영된 내가 보는 나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감정 하나 절제하지 못하는, 현실에 발 디디지 못하고 이상을 좇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나는 꽤나 정상인처럼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렇게 될 수 없었고, 정상인의 탈을 쓴 나는 진짜 나에게조차 외면받은 사람이었다.
꿈이 많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남들에게 물어보면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이것저것 시도하는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고 알 거 다 아는 나이에 꿈을 좇는, 남들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이상한 나라의 정상인 앨리스인지 정상인 나라의 이상한 앨리스인지 알 수 없었고,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이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예술계에 들어서면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술계에 나 같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나의 독특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튀는 사람이었고 이를 인정해 주는 사람 반, 대놓고 혹은 은근히 싫어하는 사람 반이었다. 예술계에서도 나는 흔치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할 때 발견한 책이 있었는데, 바로 에밀리 와프닉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관심사와 창의적인 활동 분야를 폭넓게 아우르는 사람'인 다능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다능인들은 대체로 이해받지 못하며 산다는 것도. 휴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부캐의 시대임에도 여전히 나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소리를 잘 내지 못하고 있을 뿐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책에서는 다능인을 여러 유형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피닉스 유형의 다능인이 직업을 전환할 때 고려하면 좋을 방법들이 나와있다. 그리고 이 방법들은 놀랍게도 내가 분야를 바꾸어 미술계에 들어올 때 나도 모르게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나의 사례와 함께 여기에서도 소개하니 자신이 다능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꼭 다능인이 아니어도 방향을 바꾸어 꿈을 좇고 싶은 사람들은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다.
(아래는 에밀리 와프닉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 중 내가 사용한 방법들만 추린 것이다.)
‘새로운 관심사와 관련된 행사에 참석하고, 수업을 듣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라’
나는 미술계 취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전에 ‘큐레이터 학교’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10여 명의 미술계 사람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강의하며 풀어주신 정보를 최대한 많이 흡수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모습에 영감을 받았다. 나도 이분들처럼 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과 새롭게 생긴 미술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후 미술계 취업을 준비하게 되었으니, 동 프로그램은 새로운 길을 향해 물꼬를 터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외에도 잘 찾아보면 미술계를 경험해볼 수 있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매년 운영하는 ‘시민큐레이터 양성교육’과 서울시립미술관 및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양성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나는 미술관에서 하는 공익 목적의 프로그램도 알아보고 사립 기관에서 비교적 상업적 목적으로 하는 수업도 알아보았다. 고민 끝에 후자의 수업을 선택했고 내 인맥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선배님들을 수업을 통해 만났으며, 그중 한 분과는 자주 연락드리지는 못해도 인연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자원봉사 활동은 당신에게 실무 경험을 제공하며, 당신의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들을 다시 제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당신은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도슨트'로 미술관 자원봉사를 하면서 미술계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미술계 지망생들과 미술인들이 모이는 한 온라인 사이트에는 종종 '도슨트 경험이 미술계 경력이 될까요?'라는 질문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는 '아니오. 도슨트 경험은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하는 대답이 달린다. 물론 이 말이 맞다. 도슨트는 미술관 경력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근무해도 그 미술관이 경력 인정기관이 아니라면 학예사나 준학예사 자격증을 발급받을 때 경력 인정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경력 인정에 관해 까다롭지만 나는 미술계 취업을 희망하는 지망생들에게 그래도 무엇이 되었든 미술과 연관된 일을 해보라고 권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실질적인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아도 아무런 경험이나 경력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두 번째,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미술관과 미술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다 알 수는 없어도 분위기 정도는 캐치할 수 있다. 세 번째, 이렇게 눈치껏 미술관과 미술계에 관해 알게 되면서 내가 미술계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네 번째, 만약 맞지 않다는 판단이 든다면 빠르게 다른 분야로의 전환을 고려할 수 있다. 나는 비전공자, 무경력으로 미술계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도슨트 경험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 사람이 미술계에 관심이 있구나! 하는 인상 정도는 심어주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한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일했을 당시, 나와 함께 도슨트를 하던 대학생은 이 일을 하며 미술계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나처럼 미술계 지망생은 아니었지만 만약 지망생이었다면 미술계 입문을 재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내가 도슨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분이 얼마 전에 도슨트 강의를 제안해 주셔서 첫 강의를 나가게 되었다. 한 미술관의 새로운 전시에 도슨트로 참여할 분들에게 도슨트의 정의와 마음가짐에 관해 강의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일이 돌고 돌아 '강의'라는 새로운 경력을 안겨주었다. 그러니 작은 경험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경력이 쌓여 보다 큰 경력이 되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
‘당신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을 알아내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도움이 될 것을 요약한 이메일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나는 다능인답게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간혹 행사 MC로 무대에 서기도 한다. 세상에는 많은 행사가 존재하지만 그 행사에 MC로 서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한국어 MC 분야는 한국어 아나운서들이 꽉 잡고 있다. 아나운서가 하는 여러 업무 중 하나가 MC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영어 MC 분야는 통역사나 영어 아나운서 출신들이 주로 하고 있다. 이것도 우선 영어가 자연스럽게 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 나는 한국어 아나운서 경력도 없고 통역사나 영어 아나운서만큼 영어를 잘하지도 않기 때문에 아나운싱과 행사 MC의 기본 스킬을 연마했음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방송과 무대와는 인연이 없나 보다- 하고 포기했을 때 내가 일하는 곳에서 MC 제안이 왔다. 나는 한 자치구의 문화체육과 소속으로 미술관에서 근무했는데 문화체육과 특성상 문화행사들이 많았다. 이곳에 들어올 때 자기소개서에 아나운서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쓴 덕분에 그곳에 있는 분들이 내 경험을 알아봐 주고 사회를 볼 수 있겠냐고 제안해 주셨다. 무보수였지만 내가 연습했던 것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그저 무대에 서고 싶었기 때문에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조금 더 큰 행사의 사회를 맡게 되면서 적게나마 보수도 받게 되었다. 에밀리 와프닉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먼저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실패로 돌아간 내 경험도 숨기지 않고 자기소개서에 기술했고 무보수의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대에 설 때마다 전문숍에서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기에 사실상은 마이너스를 감수하며 일했다. 물론 업의 올바른 생태계를 위해서는 정당하게 보수를 받고 일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 생태계에 우선 들어가기 위해서는 때론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거리낌 없이 오픈하며 무보수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수업을 듣거나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은 당신의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고, 당신의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연결해 줄 수 있으며 당신의 이력서를 강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미술계에 들어오고 나서도 꾸준히 미술 관련 수업을 듣고 외부에서 전시기획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으며, 자격증 공부를 해서 합격했다. 미술계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석사 학위가 거의 필수이지만,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지금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실무경력을 더 쌓아서 내가 과연 이 미술계와 어울리는 사람인지 정확히 가늠하고 싶었고, 중간에 경력 공백이 생긴 채 대학원을 가는 것도 위험부담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하지 않고 전일제 대학원을 간다면 학비를 충당해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도 있다. 첫 번째 미술관에서 근무할 당시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외부 기관의 수업을 듣고 시험공부를 하는 등의 훈련을 받았고, 미술관 근무 경력과 이 훈련들을 발판으로 가고 싶었던 미술관으로 이직할 수 있었다.
‘더 많이 훈련하고 경험이 많은 후보자들과 경쟁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당신의 전환 가능한 기술들을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의 과거 업무 경험이 해당 직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하자'
이건 내가 특히 자소서에 쓸 때 활용한 기법(?)이다. 물론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쓸 때, 지원한 회사나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을 쓰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최대한 많이 써서 연결고리를 확보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가령, 나는 도슨트를 지원할 때 아나운서를 준비했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것에 자신 있다고 적었다. 로펌에 들어갈 때는 백화점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일한 것을 강조했다. 고객, 협력업체 사원, 거래처 사람 등 외부 고객과 대리님에서부터 상무님에 이르는 내부 고객 등 백화점에서 접하는 인간관계의 범위가 정말 넓었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며 일했다는 것을 어필했고 이는 로펌에서 변호사, 비서,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일하는 데 있어서 아주 좋은 장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혀 관련 없는 분야들을 넘나든 사람으로서 무의식 중에 이런 전략을 구사한 것이지만, 사실 어떻게든 연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절박함이 뒷받침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억지처럼 보이는 이런 연관성 찾기가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러니 당신이 걸어온 길을 당당히 드러내자.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connecting the dots, 인생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고 이어질지 모른다.
내가 다능인이든 그렇지 않든 하도 튄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한 번은 친하게 지내는 동생에게 내가 정말 그렇게 특이하냐고 물어봤다. 그 동생은 나에게 이야기했다. "아니? 언니 안 튀어. 그냥 생기발랄할 뿐. 감정표현도 솔직하고 착하고. 여리기도 하고 근데 또 할 말은 하고." 이 한 마디에 그동안 품어왔던 그 모든 억울함과 나에 대한 의구심이 녹아내렸다. 나는 분명 누군가가 봤을 때는 튀는 사람이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가 봤을 때는 그저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이것저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까 다능인이든 아니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걸어가고자 하는 길에 관해서 의구심을 표하지 말자. 나도 여태껏 그래 왔지만 그런 마음은 내 인생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덕분에 생각이 많아져서 지금 이 글을 쓰는데 보탬은 되고 있지만 마음이 괴로운 나날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믿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 그 과정이 고단하더라도, 그 결과물이 언제나 장밋빛은 아니어도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용감해지는 것이다
- 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중
* 에밀리 와프닉, <모든 것이 되는 법> 발췌
* 피닉스 접근법: 하나의 분야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수행하고 난 후에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경력을 시작하는 것